전미도서상 후보, 로제타상 후보 작가. 하퍼콜린스의 선택을 믿고 읽는 세계 독자가 주목하는 한국 SF 작가 김보영이 J. 김보영이라는 필명으로 처음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작품의 배경은 2015년의 서울시 연남동. 가정폭력을 피해 가을 밤 새벽을 달리던 한 소년이 우연히 들어간 편의점에서 한쪽 다리가 없는 소녀와 화상 흉터를 지닌 여성을 만나 이 세계와 중첩된 또 하나의 세계 '심소心所'로 가는 문을 연다. 그 세계에서 모멸과 분노는 칼이 된다. 더 많은 폭력을 겪은 이가 더 강한 자가 되는 곳에서 소년과 동료들은 존엄을 향한 위대한 전투에 돌입한다.
람한 작가의 일러스트로 가시화된 두 권의 책, 1688쪽의 장대한 세계를 열면 전투하듯 몰아치는 한 세계의 문이 열린다. 퇴마사가 활약하고 두억시니와 사천왕이 출현하는, 민속학과 힌디어와 불교 문화가 중첩된 세계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우리가 좋아할 법한 이야기가 게임 스테이지처럼 깊이 나아간다. 자신의 상처로 빚어진 칼을 세계에게, 요괴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그 어디를 향해 겨눌 것인지는 온전히 그 인물의 몫. 존엄을 향해 도전하는 인물들이 던지는 “나는 나로서 온전하다.” (1권, 484쪽) 같은 힘이 있는 대사와 함께 달리다보면 이 전투가 계속되기를,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세계의 벌어진 틈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다시 이 세계와 맞물리면 현실을 사는 우리도 이 세계의 상처를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벌어진 세계의 틈에서 벌어질 다음 전투를 기다리며 소설의 속도로 가을을 달린다.
한때 세계적인 성악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한 번의 실수로 추락해버린 닭 '카실도'. 어느 날,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위기에 처한 그는 거북이 합창단 '원더풀'의 노래 선생님 자리를 제안받는다. 제자를 가르칠 수 있는 일자리를 얻어 한껏 기대에 부푼 카실도. 하지만, 그 앞에 등장한 이들은 타고난 음치의 거북이들이다. 노래 경연 대회에서 1등을 하겠다는 해맑은 거북이들과 그런 제자들 때문에 골치 아픈 카실도의 우당탕탕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페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에데베 문학상'은 당해 스페인어로 쓰인 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에 수여된다. 이 책은 심사 위원 만장일치로 2023년 수상작에 선정되었다. 성악가 닭과 음치 거북이들이 삐걱대면서도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어가는 과정이 유쾌하게 담겨 있다. 결과보다 배움 자체를 즐기는 낙천적인 거북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서서히 극복해 나가는 주인공의 성장기도 돋보인다.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며 웃음과 눈물을 선사하다가 결국에는 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감동을 안긴다.
북극곰 바오는 토끼인 토토 할머니와 남쪽 섬에 산다. 아주아주 어렸을 때 부서진 빙하에 실려 남쪽으로 흘러든 바오를 토토 할머니가 거두었다. 이 둘은 겉모습도 좋아하는 것도 너무 다르지만 잘 맞는 가족이다. 다만 토토 할머니가 걱정하는 딱 한 가지가 있으니, 바오가 더위를 잘 탄다는 것이다. 찬 음식 그만 먹어라, 잘 때 이불 발로 차지 말아라... 할머니의 걱정은 계속되지만 더운 걸 어쩌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바오는 눈이 궁금해진다. 남쪽에는 내리지 않는 눈. 시원하고 하얀 눈은 내가 온 북극에는 자주 내릴까? 거긴 여기보다 시원할까?
제1회 책읽는곰 어린이책 공모전 그림책 부분 대상을 수상한 <하얀 선물>은 사랑으로 맺어진 바오와 토토 할머니의 모습을 그린다.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바오는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데 내가 온 곳은 어디인지 결국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차갑고도 시원한 눈과 닮은 자신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과정에서 한 뼘 더 자라난다. 김수정, 백희나, 윤정주 심사위원은 "아이가 맘껏 놀다가 불현듯 자기 자신이 '좋아졌다'고 고백할 때, 심사위원들도 주인공과 함께 가슴이 시원해졌다."라고 심사평을 남겼다.
울창한 숲속에서 조난을 당했다. 휴대전화 신호는 진즉 끊겼고 해는 저문다. 살아서 도시로 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세계적인 탐험가인 저자는 오직 나무 관찰 만으로 살아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별명은 무려 '자연 속 셜록 홈즈'. 이 책에선 그가 나무를 어떻게 관찰하는지, 나무에 가득한 신호와 그 신호를 읽는 법을 알려준다.
같은 종류의 나무라도 환경에 따라 극명히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 나무뿌리, 나무줄기, 껍질의 상태, 잎의 모양, 가지의 모양과 개수, 방향까지. 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잘라내기도 하며 껍질을 얇게도 두껍게도 만든다. 잎의 모양을 빛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내는가 하면 가지의 각도도 섬세하게 조절한다. 그것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해석하면 어디에서 바람이 부는지, 해가 뜨는 방향이 어딘지, 도시는 어느 쪽이며 더 깊은 숲은 어느 쪽인지도 알 수 있다.
인간은 나무를 변함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존재로 여긴다. 그것은 믿음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객체의 위치에 가둬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무는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다. 나무가 치열하게 저항하고 적응하는 세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깨달음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숲속에서 조난 당했을 때 살 수 있는 확률에도...) 이 책은 나무라는 신비롭고 멋진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챗 GPT의 출현에 놀라워한 기억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챗 GPT 없이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직업군이 여럿이다. 적극적 유저가 아닌 이들도 대안 없는 환경 속에선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다. AI가 모세혈관처럼 침투한 일상을 그저 황금빛 미래로만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끔찍한 결말의 여러 SF 소설과 영화를 봐왔다. 이제 실제로 당도한 현실 앞에서, 순식간에 진화를 거듭하는 AI를 보면서 조금 혼란스럽다. 이렇게 빠르게 똑똑해지는 뇌를 거리낌 없이 우리의 일상에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
이 책은 이 혼란과 불안에 관한 유발 하라리의 답변이다. 유감이지만 안심할 내용은 없다. 하라리는 현실에 경고등을 켰다. 그는 AI 혁명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AI는 스스로 결정한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말이다. 2016~2017년 미얀마에서 자행된 반로힝야 폭력 이면에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거짓말이 입력된 적 없는 GPT-4가 자율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과제 수행을 한 적도 있었다. 소설이나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미 우려의 단계는 넘어섰다.
하라리는 자정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실존적 위기에 처할 것이라 말한다. AI 혁명의 전례 없는 특성과 부정적 측면을 짚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미래만 꿈꾼다면 인류는 머지않은 미래에 거대한 혼란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늘 깜깜하지만 AI와 함께하는 미래는 블랙홀 같다. 이 책은 그래도 아직은 인류에게 통제권이 있을 때,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학자가 전 세계에 울리는 라스트 콜이다.
7천만 원의 상금이 주어지는 혼불문학상의 2024년 수상작. <언제나 다정 죽집>으로 어린이문학상인 2024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한 소설가 우신영이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혼불문학상도 동시에 수상했다. 인천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송도에 산 적이 있는 작가는 이 도시의 인공적인 특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바다를 메워 만든 도시엔 필라테스 센터가 편의점보다 많고, 이 국제 도시에서 도시의 표준으로 살아가는 인물 수미가 있다. 발레 전공자로 지금은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하는 미모의 40대 여성으로 남편은 내과의이고 아들 둘은 시터가 기른다. 그는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의 남편인 석진의 내과에 면도칼을 삼킨 남동공단의 노동자 유화가 방문하게 되어 사건이 시작된다.
필라테스 학원, 병원, 헬스장, 소래포구, 덕적도 등을 오가며 소설이 욕망의 조감도를 그린다. 세태소설로서의 구체성이 현재적인 유행으로 선명해진다. 그릭요거트와 마라탕후루, 크라이오테라피(급랭 환경에 신체를 노출해 3분 만에 800Kcal를 소모한다는 기기)와 냉동 작업장인 식품 공장의 한기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으나, 이 두 구간을 오가는 사람들의 삶은 생각보다 분리되어 있지 않다. 누군가가 물자국 없이 닦아냈을 통창 빌딩숲을 바삐 오가며 기어코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의 속내를 칼날로 베어 접시 위에 담아둔 듯 서늘한 소설이다. 칼을 쥐고 회를 치는 자의 입장에 이입하든, 도마 위에 올라 베이는 자의 입장에 이입하든 우리는 모두 도시의 부속품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도시에서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인 치들의 민낯이 칼날에 비친다.
나의 유년기의 주 양육자는 TV와 책이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은 꼭두새벽에 일하러 나가 해가 지면 돌아왔다. 밥을 차리고 동생들을 돌보는 건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나의 일이 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 혼자 쑥쑥 클 순 없었고 나를 돌본 건 근처에 사는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도 바쁘시니 나 혼자 노는 게 제일 편했고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가끔은 어른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혹은 나를 돌봐줄 존재가. 그럴 땐 책에서 만난 뽀르뚜까 아저씨를 상상한다던가 제제처럼 환상의 친구인 두꺼비가 나에게도 보인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여기 집이 망해서 작은 집으로 이사한 어린이가 있다. 집의 절반을 차지하는 자개장과 함께 집을 지키는 이 어린이는 자기를 돌봐줄 어른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특히 태권도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연장자, 어른이 꼭 필요하다. 마음이 부글부글 뜨거워지면서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라도 괜찮으니까 지금 당장" 나와야 한다 외친다. 이때 이 아이의 외침을 듣고 자개장에서 환상처럼 나타난 할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태권도 학원에 데려가 주고 맛있는 밥도 챙겨준다. 비록 자고 일어나면 할머니는 자개장 나라로 사라지겠지만 마음이 활활 불타오를 때면 할머니가 또 나타날 지도 모른다. 어린이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자개장은 확실히 오랜 사랑과 보살핌이 아니면 보존되기 어렵다. 그렇기에 요즘 시대엔 찾아보기 어려울 터이다. 아름다운 자개장을 어린이를 지켜주는 어른으로 묘사한 다감함과 자개장의 아름다움을 망설임 없이 종이 위에 표현한 안효림 작가의 그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의 첫 SNS 계정은 이제는 추억이 된 '싸이월드'이다. 매일매일 미니홈피를 드나들며, 파도타기를 통해 1촌들을 둘러봤고, 도토리로 BGM을 바꿨으며, 미니룸을 꾸몄다. SNS는 소통의 공간이자 놀이의 공간이었고, 하루의 끝과 시작을 함께 했다. 하지만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이 등장한 이후 기업과 개인 모두가 SNS를 마케팅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시대가 열리게 된다. SNS가 단순한 소통의 장을 넘어 비즈니스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특히 알고리즘에 의해 콘텐츠가 추천되고, 조회수와 참여가 매출에 직접 영향을 미치면서, SNS 마케팅은 그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이제는 누구나 SNS를 통해 자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데, 이 SNS 마케팅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게리 바이너척'이다.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플랫폼을 지배하는 조회수의 법칙>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단순히 이론에 그치지 않고, 각 소셜 플랫폼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활용해 실제로 매출을 올린 사례들로 가득하다. 24시간 만에 100만 부를 팔아치운 기록적인 성과는 그가 SNS 마케팅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 책은 팔로워 수가 아닌 콘텐츠의 ‘조회수’가 승부를 가르는 시대에, 어떻게 대중의 '어텐션'을 끌어내고 이를 수익화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전략을 제공한다.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에서 억대 조회수를 기록한 그가 제시하는 6단계 프레임워크는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마케팅의 핵심을 담고 있다.
광고비 없이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가 주목받고 확산될 수 있는 방법이 이 책 속에 있다. 지금 바로 책 속에 소개된 방법을 활용해 당신만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공략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먼저 실행자가 되자. 어느 플랫폼이든 상관없다. 당신의 마케팅 성과를 극대화해 줄 열쇠가 바로 여기 있으니. 자, SNS 마케팅의 판을 바꿀 준비가 되었는가?
한강을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을 떠나, 서점 직원의 입장에서도 매 해마다 소설가 한강의 신작을 기다렸다.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작별>을 함께 엮어 출간될 '눈 3부작'의 물성을 상상하며. 본래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로 놓일 것이었던 이야기, <작별하지 않는다>가 (3부작의 두번째 이야기가 '작별'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독립된 이야기로 드디어 독자를 찾았다. 한강의 소설을 사랑한 독자라면 첫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음색이 상상될 법한 시적인 풍경으로, 눈보라가 친다.
소설가 경하는(당연히 이 인물은 소설적 인물이다.) 5월의 광주에 대한 소설을 썼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23쪽) 생각했던 그는 정작 소설을 끝내고도 한참 그 소설에서 놓이지 못하고 있다. 경하에겐 만주와 베트남 등에서 '역사를 통과한 여성들'(34쪽)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남겨온 친구 인선이 있다. 고향인 제주 중산간에서 목수가 된 인선이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부상을 입고 자신을 찾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경하는 오랜만에 인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제주의 눈보라를 무릅쓰고 1948년의 제주, 정심의 이야기 속,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락도 설명도 없이'(167쪽) 놓인 풍경에 닿는다.
5월 광주, <소년이 온다>의 모진 문장을 읽은 독자들이 그 시대를 살았던 것처럼 깊은 상처를 경험했듯, 작가도 '그 소설'을 쓰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듯하다고 한강은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말했다. 죽은 사람의 얼굴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녹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1948년의 소녀가 그 이후에도 긴 삶을 살아냈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강이 쓴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이야기, 혹은 우리를 살게하는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작가 스스로를 구한 이 소설이, 독자에게도 가닿길 바란다.
소설가 한강이 5월 18일 광주 이야기를 썼다. 참혹한 생채기를 응시하던 작가의 고요한 방식을 떠올리면 쉽게 읽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죽은 자를 보는 정결한 눈, 예를 들면 "발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와 같은 묘사를 보면 질끈 눈을 감고 싶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죽음들에 관해 쓴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을까.
중간고사를 보고, 늦잠을 자고, 배드민턴을 칠 수도 있었던 일요일. 도시는 점령당했고, 중학교 3학년 소년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다. 도청으로 들어오는 시신을 수습하며, 초를 밝히고 혼을 붙잡는 소년의 열흘을 작가는 소설로 기록했다. 아버지가 가르치던 학생의 이야기, "왜 그 학생의 이름을 말하기 직전에는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끼어드는가?" 의문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작가 스스로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고 말하는,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문학평론가 신형철).
2007년 출간된 연작 소설집. 2015년 말 영문명 '더 베지터리언'(The Vegetarian) 영국에서 출간된 후, 가디언, 인디펜던트지 등 유수 언론으로부터 대대적인 호평을 받았다. 이 책으로 한강은 한국인 최초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내 여자의 열매>)에서 이 이야기는 출발한다. 표제작 <채식주의자>,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이 죽어가는 개에 대한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점점 육식을 멀리하고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영혜'를 주인공으로 공유하며 교차한다. 단아한 문체, 밀도있는 구성으로 섬뜩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한다.
"여전히 계속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아름다움과 빛과 같이 어떻게도 파괴될 수 없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소설가 한강의 길에 박수를 보낸다.
1993년 시인으로 등단한, 소설가로 잘 알려진 작가 한강이 엮은 첫 시집. 기실 한강의 소설이 독자에게 선보인 문장은 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라고 첫 문장을 쓴다. (<밝아지기 전에> 中, <노랑무늬영원>)
이렇듯 작가가 '온 힘으로 기다린' 단단한 문장들이 60편의 시로 실렸다. 새벽, 고요, 눈, 저녁, 겨울, 빛 같은 이미지들.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다." (몇 개의 이야기 12 전문)과 같은 오래 읽고 깊이 소화해야할 만한 감정들.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회복기의 노래 전문) 같은 시의 문장과 문장 사이, 작가의 소설 <회복하는 인간>을 떠올리게 하는 의미심장함. 상처입은 영혼에게 빛처럼 닿는 언어, 한강의 말이다.
2016년 5월, 반가운 소식이 아침을 열었다. 한국인 최초로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를 통해 맨부커상을 수상했음이 알려진 것. <채식주의자>의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에서 11년 전 출발한 질문이 타박타박 이어지고, 이윽고 '인간의 밝고 존엄한 지점'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작가 한강이 최신작 <흰>으로 독자를 찾았다.
소설은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으로 이어지는 목록들.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달떡처럼 희고 어여쁜 아기. 그 이가 죽은 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나는 언니의 죽음, 유태인 게토에서 타살되었을 여섯살 배기 아이의 죽음과 공명한다. 시처럼, 소설처럼 다문다문 문장들이 이어지고, 흰 것들의 이미지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향해 희붐한 빛을 전한다.
여자는 말을 잃었다. 아이를 잃었고, 어머니를 잃었으니 말을 잃는 게 당연하다 상담가의 말에 여자는 말한다.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다고. 오래 전에도 여자는 말을 잃었던 적이 있다. 그녀를 깨웠던 건 낯선 이국의 말. 여자는 이번에도 이미 저물어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를 택한다. 그리고 빛을 잃어가는 남자. 가족을 독일에 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친다.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 행간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정적인 의미들이 와글댄다.
<채식주의자>, <내 여자의 열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시적인 문장과 압축된 언어가 그 여자의 침묵과 그 남자의 빛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주어와 태를 결정하지 않고는 한 단어도 내뱉을 수 없는 희랍어처럼, 소설은 망설이고 조심스럽다. 예민한 기척과 절제된 언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미 죽은 말을 배우며 이들은 더듬더듬 서로를 스친다. 진실로 아름다운 소설, 오래 읽을수록 그 의미가 은은하게 빛난다.
한강의 소설 속, 외롭고 고단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대체로 격렬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묵묵한 표정으로 도시를 떠돌며 자신의 고통을 과시하지 않는다. 다만 견딜 뿐이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지는 현실적 풍경들을 지나다 보면, 소설이 묘사하는 감정들이 밀물처럼 목끝까지 차오른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의 작품을 통해 많은 독자가 그의 소설과 공명한 바 있다. 1995년 발표한 작가의 이 첫 번째 소설집에 그의 소설이 묘사하는 외로움, 애틋함, 떠돎의 기원이 있다.
누군가의 노래에선 '아름다운 얘기가 있'었던 그곳, 여수. 서효인의 시에서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였던 그곳이 자흔과 정선에겐 떠나도 떠날 수 없는 곳, 끝내 찾아내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만다. 한강의 소설 속 여수는 '녹슨 철선들이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는' 곳이다. "자흔의 무관심하고 지쳐 보이는 미소에서 드러나는 무수한 세월의 상흔"이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발견되는 표정"임을 알아챌 수 있는 독자라면, 한강의 이 애처로운 슬픔을 끝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하다. 지독하다. 처연하다. 영롱하다. 가벼운 사랑과 말장난 같은 문장의 반대편에서, 한강은 깊고 진지한 본연 세계를 고수했다. 4년을 붙잡았던 이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명징한 언어로 통증 같은 사랑을 말한다. 겨울의 새벽길, 폭설에 묻힌 자동차 사고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촉망 받던 여류화가 서인주의 갑작스러운 죽음. 서인주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는 그녀의 친우 이정희, 그리고 서인주의 죽음을 신화화함으로써 자신의 사랑 역시 신전에 올리려 하는 남자 강석원.
정희는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인주의 지난 행적을 필사적으로 추적한다. 그리고 정희가 만나게 될 진실은…. 소설은 인물의 심연과 이야기의 줄기를 병치시켜 독자의 지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예술, 삶, 사랑, 생명. 한강은 잊히는 것들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삶 쪽으로 바람이 분다, 가라, 기어가라, 기어가라, 어떻게든지 가라.” 소설가의 한 문장처럼, 사 년에 걸쳐 한 숨씩 토해낸 소설가의 문장이 당신의 삶 쪽으로도 분다.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할까? 마음속에 꼭 하고픈 메시지가 있는 사람들이 작가가 되기도 하지만 우연히 목도한 사진 한 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기억 전달자>로 뉴베리상을 수상한 작가 로이스 로리는 우연히 '빈데비 소녀'로 알려진 늪지 미라의 사진을 본 후 그 미라에 사로잡혀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빈데비 소녀'는 어떻게 1세기 철기 시대를 살았을까?
로이스 로리는 탁월한 상상력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창조한다. 소녀이지만 전사가 되길 갈망하는 '첫 번째' 전사. 그리고 신체가 약하게 태어나 전사가 될 수 없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어쩌면 늪지 미라의 진짜 이야기. 두 가지 이야기 사이사이에 고고학적 발견, 역사 사료, 과학적 증거와 더불어 작가의 사적인 글이 담긴 독특한 구성은 글의 몰입을 도와준다.
이야기는 비록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삶의 일부이다. 이야기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이리저리 연결되어, 자꾸만 뻗어 나가는 인간 존재의 거대한 총합이자 우리가 역사라 부르는 것이 된다. (p.186) 짧은 두 가지 이야기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퍼즐이 될 것이다.
1920년대 뉴욕 롱아일랜드. 매일 밤 대저택에서 파티를 하며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광란의 시대를 즐기면서 첫사랑이 사는 저 너머의 초록 불빛을 바라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심윤경이 명불허전의 솜씨로 <위대한 개츠비>의 이야기를 2020년대의 서울, 한강변으로 옮겨왔다. 여자는 압구정 H아파트에 살고, 남자는 성수동의 T타워에 산다. 이들은 밀주를 파는 대신 가상화폐와 진단 키트를 팔고 상장을 한다. 이 이야기에도 파티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개츠비를 동경하던 '닉'이 아닌 여성 주인공 '이규아'의 눈. 그리하여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의 빛을 좇게 된다.
이규아라는 인물의 개성에서 이야기의 아귀가 개연성을 얻는다. 성수 토박이로 재개발과 함께 가족은 재산을 잃었고, 한국의 개츠비들과 함께 서울대 경영학과를 다녔던, 뉴욕에서 예술학교를 다닌, 두 번 이혼을 한 사십대 후반 여성인 와인바 사장인 그는 펜트하우스 속 광란의 파티에 완전히 동화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이 관찰자의 눈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보인다. '우리는 이성에게 인기 없는 족속들이다.', '매력 있는 것들은 세상에 따로 있고, 그들끼리 알아본다.'(140쪽)라고 말할 정도로 거리두기를 잘 하는 주인공은 빛에 미혹되지 않고 진짜 빛이 출발하는 지점을 마침내 찾아낸다. 이 소설을 읽고 여의도를 지나며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한 '밤섬'을 왼편에 두고 도시가 다르게 인식되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스스로 '개츠비'를 참칭했던 많은 유명인사의 몰락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개츠비가 등장할 것도 알고 있다. 그게 우리가 고전을 다시 읽는 이유, 이 시대에 이러한 소설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작품성 높은 다수의 아동문학서를 배출해온 마해송문학상, 제20회 수상작으로 김지완 작가의 <아일랜드>가 선정되었다. <나의 장점은?>에서 따스한 그림체를 선보인 경혜원 작가가 이번 작품에 온화한 느낌을 자연스럽게 입혔다.
이 책은 국제공항을 배경으로, 인공 지능 안내 로봇 '유니온'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결국엔 폐기되는 로봇이지만 유니온 2호는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고유한 존재다. 탑승객인 영화감독 제인 리를 만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 후로 자아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꿈이란 것을 좇게 된다. 자신처럼 '영혼'을 지닌 탐색견 티미, 공항 미화원 안다오와 교감하고 우정을 쌓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로봇에 영혼을 불어넣고, 타 존재들과 다정한 관계를 맺으며, 이별과 상실의 감정을 경험하게 한 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공항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이토록 많은 서사를 펼쳐 보이면서도 매끄럽게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라리사 뵐레벨트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가장 절친한 친구의 집에서 자고 오겠다던 16세 소녀는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아침 테니스클럽 근처 성모상 처소 뒤편에서 발견되었다. 언덕과 벽 사이의 움푹 파인 곳에 마치 자는 것처럼 누운 채 무릎을 끌어당기고 왼팔을 벤 채로. 누군가 덮어준 것처럼 재킷을 머리와 상체에 덮은 채로. 라리사의 옷과 몸에서 확보한 남성 DNA의 주인은 파바드 마흐무디,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이며 작년에 성폭행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변호인의 항소로 1년 넘게 미결 구금되었다가 사흘 전에 석방되어 현재 종적을 감췄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 한 여자가 라리사의 엄마 안네에게 다가가 제안한다. 딸을 죽인 살인자를 직접 죽일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것이 정의라고.
독일 추리 소설의 대명사 넬레 노이하우스의 신작.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타우누스 시리즈’의 열한 번째 작품이다. 교묘한 법 기술을 활용해 이기는 것만 중요한 게임이 되어버린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믿음을 포기하게 된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다. 그들에게 접근하여 분노를 부채질하며 사적 제재를 종용하는 의문의 집단, 세계 곳곳에서 점점 쟁점화되어 가는 난민과 통합 정책,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뉴스거리를 양산하는 데 몰두하는 언론, 피해자의 고통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소셜미디어의 댓글과 밈 문화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폭발하는 크리스마스 직전 14일 동안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펼쳐진다.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 때, 우리는 누구를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누구나 마음속에 '살아있는 아티스트의 무덤' 몇 개씩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묘비엔 한때 사랑했으나 이제 사는 동안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이의 이름들이 적혀있다.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것은 해묵은 토론 주제이지만 늘 비슷한 결론에 닿곤 한다. 그를 캔슬 하기, 혹은 그의 존재와 작품을 별개로 보기. (범죄자를 숭배하는 이들은 논외다.) 대체로는 전자를 택한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의 마음이라는 것엔 어딘가 오묘한 지점이 있어서 언제나 철문 닫듯 쾅 닫히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배신의 충격을 추스르고 나면 일상에서 슬며시 생각나는 것이다. 내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과 범벅된 그의 몇몇 작품이...
이 책은 여기서 시작한다. 괴물임이 밝혀진 예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때때로 감탄하게 되는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클레어 데더러는 괴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며 그들의 작품과 괴물성, 그리고 그것들을 복합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소상히 서술한다. 대부분의 현실과 윤리의 문제가 그렇듯 논증 끝엔 또 다른 질문이 따라붙는다. 이 위험하고 어려운 질문들의 꼬리물기 앞에서 데더러는 움츠러들지도 가면을 쓰지도 않은 채 대답을 저벅저벅 이어간다. 두려운 질문임이 분명한데도.
그는 이제 괴물들에 대해 우리가 가진 커다란 한두 개의 선택지, 그 사이에 질문 보따리를 여러 개 만들어두었다. 캔슬 뒤에 남는 찜찜함, 자기 자신의 가해자성, 천재라는 개념이 만들어내는 환상 등에 대해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거리가 풍성하게 남았다. 클레어 데더러의 용감함이 만들어낸 자리다. 괴물들은 사라질 것 같지 않고, 우리 사회의 논쟁이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때를 맞이했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 차원의 문을 열어줄 책이다.
한국문학의 자장 안에서 태동한 작품이 2024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한강 작가는 <작별>로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선정되면서 프랑크푸르트국제도서전에서도 한국 작품에 대한 판권문의가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2024년 한국문학의 성취를 되짚는 기획, 김유정문학상이 제18회 수상작가를 호명했다. 페르난두 페소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등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기도 하며 세계 문학의 잎사귀를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전해온 소설가 배수아가 신화 속 인물 '바우키스'에서 뻗어나가는 나무 같은 이야기로 수상했다.
그때 바우키스는 필레몬의 몸에서 자라나는 잎사귀를 보았습니다. 또 필레몬도 아내 바우키스의 몸에서 자라는 잎사귀를 목격했습니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나그네를 정성스럽게 돌봐준 덕분에 한 날 한 시에 나무가 되는 복을 얻은 아내 '바우키스'와 남편 '필레몬'의 일화가 소설 속 '나'와 '모형 비행기 수집가'의 이야기로 변용된다. 배수아의 소설답게 '최근 몇 년 사이 친구들이 사방에서 미친 듯이 죽어가고 있다고'(43쪽) 같은 문장이 반복하며 겹겹의 의미가 쌓인다. 단 하나의 어휘를 입에 문 채 애도하며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아름다운 소설. 다 읽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차오른 감각이 어른거린다. 문지혁, 박지영, 예소연, 이서수, 전춘화의 수상후보작이 함께 실렸는데 중국 교포 작가인, 20대 조선족 여성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전춘화의 소설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국경을 벗어난, 세대를 넘나드는, 계급을 사유하는 현재적인 소설과 함께 한국문학이 지금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베스트셀러 <열세 살의 걷기 클럽> <헌터걸>을 집필한 김혜정 작가가 '돈으로 시간을 사고파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책의 배경은 최첨단 미래 세상. 어느 유전자 연구팀이 시간 유전자를 발견해, 시간 유전자의 DNA를 타인에게 이식하는 '시간 유전자 이동' 기술을 개발했고, 타임 스토어는 '시간 유전자 이동' 기술을 토대로 부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시간 관리사이자 시간 유전자를 팔아서 부유해지고 싶은 엄마, 시간 유전자의 사고파는 행위에 회의감을 느끼는 아빠, 엄마가 짜준 스케줄에 맞춰 영재 학교 입학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호, 타임 스토어를 창립해 막대한 부와 무한한 생명을 얻게 된 미스터 유, 메모리 D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과거의 기억을 잃고 사는 세랑 누나. 캐릭터 분명한 각각의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시간 유전자와 이동 기술을 둘러싼 음모, 불법 거래소의 실체 등을 파헤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게 펼쳐낸다. 더 나아가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을 비틀고 꼬집으며 독자들에게 묻는다. "시간을 팔아 부유한 사람이 될 것인가, 돈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가치와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유니크한 소재와 흡입력 강한 스토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책이다.
가가조 의과대학 부속병원 정신과에서 근무하는 의사 기사야마 세이타는 스스로 의아할 정도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배우 출신의 아내 기키는 여전히 지역방송국의 TV 드라마나 CF 등에서 활약 중이고, 첫째 딸 마후유는 학업과 동시에 얼굴을 숨긴 채 음악 유닛의 보컬로 활동하며 인지도를 쌓는 중이었다. 둘째 딸 아야카 역시 지병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기사야마는 유년 시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아무리 행복한 가정도 단 하나의 작은 균열로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가족을 지키려면 어떤 균열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 균열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선택이라도 할 수 있다.
일본 특수설정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가 시라이 도모유키의 신작. 작가의 전작 <명탐정의 제물>에 이어 2년 연속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를 차지했다. 잔혹하고 엽기적이며 기괴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독자로 하여금 눈을 질끈 감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거듭되는 파격적인 이야기 전개로 결말에 이를 때까지 긴장감과 몰입감 속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다양한 장르적 설정과 맞물려 탄생한 파격적인 작품.
올해로 등단 18년 차 소설가인 작가 최진영이 이제껏 써온 소설의 모든 것을 담은 산문집을 출간했다. 24절기에 맞춤한 편지와 산문으로 이뤄진 구성은 그 어디를 펴도 하나의 완결된 글이 되어 최진영 작가를 사랑하며 그의 궤적을 함께 했던 팬들에게 큰 선물이 된다.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 그의 세계는 24절기 속에 내밀하게 녹아 있고, 책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우리만의 어떤 비밀들은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 안내하는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한다. 때론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일이 버겁고 고되지만, '장래 희망은 계속 쓰는 사람'이라는 그는 누구보다 소설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 창작자의 내면의 이야기를 색다른 시선으로 느끼고 싶은 모든 독자, 상강을 지나 입동에 이르는 고요한 날들에 신선한 바람 같은 글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주인공 이름은 강정인, 별명은 닭강정, 해밀초등학교 2학년 1반 학생이자, 해든 분식 사장님의 둘째 딸이다. 어느 날, 정인이의 오렌지색 땡땡이 우산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같은 반 김반찬을 범인으로 의심한 정인이는 우산에 주문을 건다. "그 우산을 펴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으로 변한다!" 그런데 그 주문에 걸린 건 다름 아닌, 강정인. 정인이는 쳐다보기도 싫은 닭강정으로 변신해 버리고 마는데…
아홉 살, 인생의 최대 위기에 봉착한 정인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다 좀 웃겨서 일단 웃기로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닭강정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도 무서워하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웃겨서 일단 웃겠다고 하고 받아들이는 건강한 사고방식이 특히 인상적이다. 평범한 가정과 보통의 학교생활에 '닭강정 변신'이란 재미난 판타지 요소를 가미하여 쉬운 문장으로 순하게 풀어낸 점도 저학년 동화 다운 장점을 발휘한다. 닭강정이 된 정인이가 주문에서 어떻게 풀려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아이만큼이나 어른에게도 쫄깃한 재미를 선사한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할 때 종종 겪는 어려움은 실로 다양하다. 예를 들어,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서 청중의 반응이 냉담하면 발표자는 큰 실망을 느끼고, 친구와의 대화에서 무심코 던진 말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제시할 때, 반대 의견에 부딪히면 논쟁이 격해져 원래의 의도가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업무 회의에서 자신이 제안한 아이디어가 상대방에게 외면당하는 순간, 그동안 준비한 노력과 열정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대화의 본질을 잃게 하고, 소중한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대화의 목적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그 본질을 놓치게 되는 듯하다.
제이 하인리히의 <싸우지 않는 기술>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들을 제공한다. 이 책은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대화와 설득의 기법을 이야기한다. 핵심 메시지는 간단하다. "최고들은 싸우지 않는다. 이겨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상대의 진정한 욕구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대화를 이끌어내는 28가지 실질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상대에게 작은 승리를 내주고 그 대가로 더 큰 결과를 얻는 전략,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법, 그리고 논쟁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법 등이 담겨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독자들은 더 나은 소통 능력을 갖추고, 각자의 상황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싶은가?", "사람들을 내게 몰입시키고 싶은가?" 이 책을 통해 효과적인 소통 기술을 익혀보라고 말하고 싶다. 대화의 기술을 배우고, 이를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준비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승리는 당신의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자유와 민주, 인권 존중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꽃피운 나라, 풍부한 부존자원과 광활한 영토를 기반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로 불린 미국은 장기간 지속되어 온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지 못하고 끝내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문자 그대로 유혈이 낭자한 극한의 대립 끝에,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는 연방공화국은 미연방을 탈퇴해 독자적인 나라를 설립한다. 청교도적 신권정치를 표방하는 공화국연맹은 12사도가 나라를 이끄는 기독교 원리주의 국가로 회귀한다. 그리고 2045년. 연방공화국 정보국 요원 샘 스텐글에게 미니애폴리스의 중립지대에서 공화국연맹 경찰국 요원을 암살하라는 비밀 지령이 떨어졌다. 타깃의 이름은 케이틀린 스텐글. 샘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이복자매였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신작 장편소설. 하나였던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대립하는 두 체제가 서로 정당성을 주장하며 상대 우위에 서기 위해 치열한 대외 선전전과 막후 첩보전을 벌이는 모습에서 여러 가지 역사적 모티프를 떠올릴 수 있다. 가족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두 자매가 각자가 선택한 체제의 승리를 위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속 두 나라로 분리된 나라의 구성원들은 이제 원하는 정부를 갖게 되었으니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까? 종교적 근본주의에 물들어 신성 모독죄와 화형식을 부활시킨 공화국 연맹은 물론, 연방공화국 역시 원활한 행정과 투명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체내에 삽입한 정보 칩 때문에 온 국민이 감시당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세상에 완벽한 나라는 있을 수 없다면, 선택은 두 체제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샘과 케이틀린의 선택은 무엇일까.
찰리 멍거는 투자 업계에서 그야말로 전설적인 존재로, 단순한 투자자가 아닌 깊이 있는 사유와 철학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버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지성으로 무장한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주식 시장에 입문하였고, 마침내 워런 버핏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찰리 멍거와 워런 버핏의 협력은 단순한 파트너십을 넘어, 서로의 철학과 지혜를 깊이 있게 결합해 버크셔 해서웨이를 세계적인 투자회사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00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둔 2023년 11월 28일, 찰리 멍거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통찰은 <가난한 찰리의 연감>으로 남았다.
이 책은 찰리 멍거가 평생 동안 쌓아온 철학과 지혜를 집대성하는 한편, 임종 직전까지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고,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마지막 강연을 전면 개정한 최종판(4판)이다. 찰리 멍거는 투자를 단순히 수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보지 않고, 보다 깊은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데, 이 책은 그가 지닌 넓고도 깊은 지식의 스펙트럼을 여실히 보여준다. 찰리 멍거는 사업, 재무, 철학, 물리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독자들에게 지혜와 통찰을 제시하고, 투자의 성공이 단순히 운이 아닌 지식과 판단력의 결과임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어떤 사고방식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찰리 멍거는 세상을 바라보는 법부터 결정의 순간에서 실수를 줄이는 방법, 그리고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삶의 원칙까지 아우르며 독자들이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했다.
찰리 멍거의 가르침은 투자의 영역을 넘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삶을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을 넘어, 지혜로운 판단과 끊임없는 배움을 강조했는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찰리 멍거가 전하는 지혜의 정수를 접할 수 있다. <가난한 찰리의 연감>이 투자를 시작하려는 초심자에게는 하나의 교과서가 되어주고, 인생의 성공과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나침반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아빠 이야기는 내게 참으로 어려운데 소띠인 나의 아빠는 정말 소처럼 일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같이 해본 기억이 아주 드문데 항상 곁에 있었음에도 항상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이 그림책은 그와 반대로 바다를 일터 삼아 부재가 짙은 ‘마도로스’ 아버지와 딸의 깊은 유대감에 관한 이야기다.
여러 계절을 바다에서 보내는 아버지는 딸이 외로워하지 않도록 먼바다에서 커다란 소라 껍데기와 낯선 인형을 선물로 준다. 외로움을 느낄라치면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 가만히 바닷소리를 듣는다. 그때마다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아빠의 바다. 아빠의 바다에선 태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구름과 가까운 바다에서 쉴 수도 있다. 아빠처럼 따뜻한 돌에선 아빠 냄새가 난다. 머물지 않고 멀리 먼바다까지 이동하는 마도로스 아빠는 물리적으로 곁에 있진 않지만 언제나 딸의 곁에 머문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닌 것처럼.
어느덧 아빠와 같은 눈높이가 된 딸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발을 내딛는다. 외로웠지만 충만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동등한 어른이 되어 떠나는 이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준다. 가까이 있었지만 외로웠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나만의 바다를 열심히 헤엄치고 있다. 이 그림책 속 아이처럼.
동물해방물결은 동물을 세는 단위를 '마리'가 아닌 '명'이라고 한다. 그에 따라 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에서는 소를 한 명, 두 명으로 센다. 이상하지. 단어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소가 전보다 훨씬 더 인간에 가까운 생명체로 감각된다. 소와 돼지가 고기가 아닌 생명이라는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느껴진다.
이 같은 감각의 전환을 이 책은 무시로 선사한다. 동물의 생명과 죽음을 이용 가치로만 보던 인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삶으로 바라보는 일이 이렇게나 새로울 줄 몰랐다. 고기가 아닌 소를 키우는 일이, 퇴역한 경주마를 돌보는 일이 미답의 길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AI가 일상의 저변에 깔리고 개인이 우주에 인공위성을 쏘는 시대에 우리는 고작 2살(일반적인 도축 나이) 넘게 산 소를 돌보는 방법을 몰라 이리저리 헤맨다.
이 절망의 현실 위에서, 책은 희망의 방향으로 몸을 한껏 기울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추어리의 활동가들이 헤매면서 길을 찾아가는 여정, 그 속에서 동물들과 눈빛을 교환하고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읽노라면 짙은 희망의 온기가 마음을 덮어 감싼다. 동물들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모습, 치유의 많은 부분을 자연에 기대는 모습, 동물들이 자신의 삶을 비로소 서서히 '즐기게' 되는 모습은 분명히 마음의 깊은 어딘가를 울려 버린다. 울린 곳에서 돌봄과 삶에 대한 영감이 무수히 솟아난다.
수년 전 어느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컬트레이너 역할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가수와 오디션 참가자가 경연 준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참가자가 ‘건들건들’ 거리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이 모습을 본 가수는 “예의 있게 이야기하라.”며 단호하게 주의를 주었고, 참가자의 사과가 이어진 후 이야기를 경청하며 차분하게 조언해 주었다. 이 모습은 프로그램 방영 당시 물론, 수년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유명한 가수의 단호한 태도(와 팔뚝의 문신)가 의외의 매력으로 다가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 ‘예의’에 대한 사람들의 어떤 ‘갈증’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언가에 갈증을 느낀다면, 그것이 부족한 탓이다. 수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던 예의, 무례, 배려, 불관용, 매너, 품격, 천박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무례함과 불관용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소비, 여행, 온천, 지도, 인상, 추리소설, 관상 등 독특한 소재로 독자들을 역사적 사유의 세계로 이끌었던 설혜심 교수가 특정 사회에서 예의 바르다고 여겨지는 행동, 매너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저자는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생산된 100여 종의 예법서를 통해 서양 매너의 이론을 정립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부터 중세의 기사도, 에라스뮈스와 로크의 예절 교육, 18세기 영국식 매너와 젠틀맨다움을 거쳐 상류사회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에티켓으로의 퇴행과 계급을 벗어나 개인화된 20세기의 에티켓까지 매너의 역사를 일별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류가 왜 매너를 발명해 냈고, 그토록 오랜 시간 유지해 온 이유가 무엇인지 추적한다. 지배 엘리트의 포섭과 배척을 위한 기제라는 매너의 본령이 역사적 흐름 속에서 흔들리고 개인화되어 가는 양상, 더 나은 관계를 만들고 더 좋은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결론적으로 평화로움을 창조하는 매너의 역할 등 두꺼운 책 안에 저자의 통찰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