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어디서 시작할까? 마음속에 꼭 하고픈 메시지가 있는 사람들이 작가가 되기도 하지만 우연히 목도한 사진 한 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기억 전달자>로 뉴베리상을 수상한 작가 로이스 로리는 우연히 '빈데비 소녀'로 알려진 늪지 미라의 사진을 본 후 그 미라에 사로잡혀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빈데비 소녀'는 어떻게 1세기 철기 시대를 살았을까?
로이스 로리는 탁월한 상상력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창조한다. 소녀이지만 전사가 되길 갈망하는 '첫 번째' 전사. 그리고 신체가 약하게 태어나 전사가 될 수 없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어쩌면 늪지 미라의 진짜 이야기. 두 가지 이야기 사이사이에 고고학적 발견, 역사 사료, 과학적 증거와 더불어 작가의 사적인 글이 담긴 독특한 구성은 글의 몰입을 도와준다.
이야기는 비록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삶의 일부이다. 이야기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이리저리 연결되어, 자꾸만 뻗어 나가는 인간 존재의 거대한 총합이자 우리가 역사라 부르는 것이 된다. (p.186) 짧은 두 가지 이야기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퍼즐이 될 것이다.
- 유아 MD 임이지
책 속에서
각종 예식과 축제 때 환호와 축하를 받는 건 언제나 남자의 몫이었다. 여자는 결코 그런 것을 받지 못했다. 이런 여자의 삶을 보며 에스트릴트의 마음에 열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집안일과 출산으로 수척해지고 너무 빨리 늙어 버리는 그저 또 한 명의 여자, 아내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로 살고 싶단는 열망이었다. 여자의 삶이 그보다 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p.39
1920년대 뉴욕 롱아일랜드. 매일 밤 대저택에서 파티를 하며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광란의 시대를 즐기면서 첫사랑이 사는 저 너머의 초록 불빛을 바라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심윤경이 명불허전의 솜씨로 <위대한 개츠비>의 이야기를 2020년대의 서울, 한강변으로 옮겨왔다. 여자는 압구정 H아파트에 살고, 남자는 성수동의 T타워에 산다. 이들은 밀주를 파는 대신 가상화폐와 진단 키트를 팔고 상장을 한다. 이 이야기에도 파티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개츠비를 동경하던 '닉'이 아닌 여성 주인공 '이규아'의 눈. 그리하여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의 빛을 좇게 된다.
이규아라는 인물의 개성에서 이야기의 아귀가 개연성을 얻는다. 성수 토박이로 재개발과 함께 가족은 재산을 잃었고, 한국의 개츠비들과 함께 서울대 경영학과를 다녔던, 뉴욕에서 예술학교를 다닌, 두 번 이혼을 한 사십대 후반 여성인 와인바 사장인 그는 펜트하우스 속 광란의 파티에 완전히 동화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이 관찰자의 눈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보인다. '우리는 이성에게 인기 없는 족속들이다.', '매력 있는 것들은 세상에 따로 있고, 그들끼리 알아본다.'(140쪽)라고 말할 정도로 거리두기를 잘 하는 주인공은 빛에 미혹되지 않고 진짜 빛이 출발하는 지점을 마침내 찾아낸다. 이 소설을 읽고 여의도를 지나며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한 '밤섬'을 왼편에 두고 도시가 다르게 인식되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스스로 '개츠비'를 참칭했던 많은 유명인사의 몰락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개츠비가 등장할 것도 알고 있다. 그게 우리가 고전을 다시 읽는 이유, 이 시대에 이러한 소설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 소설 MD 김효선
이 책의 한 문장
나는 이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아니 이들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클리셰의 총집합 같아 슬그머니 정이 떨어졌는데, 겉으로는 행복해진 사랑새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의 사랑을 응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태환과 광채는 즐겁게 잘 살고 있다. 연지도 즐겁게 살면 된다.
작품성 높은 다수의 아동문학서를 배출해온 마해송문학상, 제20회 수상작으로 김지완 작가의 <아일랜드>가 선정되었다. <나의 장점은?>에서 따스한 그림체를 선보인 경혜원 작가가 이번 작품에 온화한 느낌을 자연스럽게 입혔다.
이 책은 국제공항을 배경으로, 인공 지능 안내 로봇 '유니온'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결국엔 폐기되는 로봇이지만 유니온 2호는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고유한 존재다. 탑승객인 영화감독 제인 리를 만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 후로 자아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꿈이란 것을 좇게 된다. 자신처럼 '영혼'을 지닌 탐색견 티미, 공항 미화원 안다오와 교감하고 우정을 쌓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로봇에 영혼을 불어넣고, 타 존재들과 다정한 관계를 맺으며, 이별과 상실의 감정을 경험하게 한 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공항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이토록 많은 서사를 펼쳐 보이면서도 매끄럽게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 어린이 MD 송진경
심사평
날렵하고 자극적인 서사가 SF의 전부인 양 범람하는 피로감과 아쉬움이 오래 가중되던 가운데 인간과 비인간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SF의 본래적인 질문 하나를 다시 가져온 점이 무엇보다 반갑다. _심사위원: 황선미(동화작가), 최나미(동화작가), 김유진(아동문학평론가)
라리사 뵐레벨트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가장 절친한 친구의 집에서 자고 오겠다던 16세 소녀는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아침 테니스클럽 근처 성모상 처소 뒤편에서 발견되었다. 언덕과 벽 사이의 움푹 파인 곳에 마치 자는 것처럼 누운 채 무릎을 끌어당기고 왼팔을 벤 채로. 누군가 덮어준 것처럼 재킷을 머리와 상체에 덮은 채로. 라리사의 옷과 몸에서 확보한 남성 DNA의 주인은 파바드 마흐무디,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이며 작년에 성폭행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변호인의 항소로 1년 넘게 미결 구금되었다가 사흘 전에 석방되어 현재 종적을 감췄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 한 여자가 라리사의 엄마 안네에게 다가가 제안한다. 딸을 죽인 살인자를 직접 죽일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것이 정의라고.
독일 추리 소설의 대명사 넬레 노이하우스의 신작.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타우누스 시리즈’의 열한 번째 작품이다. 교묘한 법 기술을 활용해 이기는 것만 중요한 게임이 되어버린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믿음을 포기하게 된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다. 그들에게 접근하여 분노를 부채질하며 사적 제재를 종용하는 의문의 집단, 세계 곳곳에서 점점 쟁점화되어 가는 난민과 통합 정책,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뉴스거리를 양산하는 데 몰두하는 언론, 피해자의 고통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소셜미디어의 댓글과 밈 문화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폭발하는 크리스마스 직전 14일 동안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펼쳐진다.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 때, 우리는 누구를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 소설 MD 박동명
이 책의 첫 문장
남자는 마지막으로 집 안을 거닐었다.
이 책의 한 문장
“그가 당신 딸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당신도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어요. 이게 정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