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이 소설을 여는 문장은 이토록 강렬하다. 소설의 도입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작법서들의 말대로라면 <킨>은 멋진 스타트를 끊었다. 남은 관건은 소설의 나머지 부분, 특히 초반부가 도입부의 무게를 버텨낼 수 있느냐다. <킨>은 더할 나위 없이 모범적으로 전개된다. 1976년에서 갑자기 1815년의 남부 지방으로 시공간을 이동한 '흑인' '여성'은 생명의 위기나 다름없는 억압 하에 놓이지만, 옥타비아 버틀러는 그 억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빠른 전개의 시간여행 이야기 속에 그대로 녹여냈다.
이 속도감은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단단하게 엮는다. 사실 많은 독자들은 (한국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룬 소설이 비교적 고루하고 잘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토록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페이지를 금방 넘기게 하는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생각이 분명 바뀔 것이다. <킨>은 대단히 우아한 SF이며 각종 차별에 대항하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고 앞의 두 가지에 별로 관심이 없더라도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글로 쓴 이야기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