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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이 말하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뼈들이 부서졌고 입안엔 피가 가득하다."
죽은 자가 말한다, 우물 밑바닥에서. 우리는 듣는다, 읽기 시작한다. 살인자의 정체를 궁금해하면서. 하지만 이내 등장하는 살인자의 고백.
"그 멍청이를 죽이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곧 사람을 죽이게 될 거라고 누군가 말해 주었더라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그 불운한 엘레강스를 죽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내게 닥친 최악의 고민거리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 방법 말고는 해결책이 없었다. 그 멍청이 하나 때문에 다른 모든 세밀화가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눈치빠른 사람은 목차만 봐도 알겠지만, 이 책의 화자는 한 사람이 아니다. 각 장마다 다른 이가 입을 열어 말한다. 시체가 말하고 살인자가 말하고 용의자가 말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한 그루 나무가 말하고 금화가 말하고 빨강(색)이 말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각각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야기들이 층층이 쌓여 지어진 화려한 구조물이다.
16세기 이슬람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 소설의 외양은 분명 '역사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이 쉽게 연상된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과거를 배경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탐정 역할을 맡게 될 사람이 등장한다. 사건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또다른 살인. 사건은 점점 더 크게 번져가고 이야기의 막바지, 범인과 살인의 동기가 밝혀진다.
이 소설을 지배하는 건 무엇보다도 독특한 시대적 분위기이다. 금박을 씌우고 공들여 그림을 그리고-'책'이 하나의 예술품으로 여겨지던 시기. 신의 관점으로 그림을 그려왔던 이슬람 세밀화가들의 세계에, 인간의 관점을 중시하는 유럽의 화풍이 유입되면서 갈등과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살인은 개인적 원한이나 치정에 얽힌 것이 아니라 두 세계의 충돌이 빚어낸 결과이다. 문화의 충돌, 문명의 충돌, 가치관의 충돌. 이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터키의 지리적 조건과 맞물리며 소설의 흥미를 더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은유와 알레고리로 가득찬 이슬람 고유의 설화와 민담들이 곳곳에 등장,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의 성찬을 누릴 수 있다. 제목처럼 강렬하고 명징한 느낌, 그 자체로 한편의 세밀화 같은 소설. - 박하영(2019-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