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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 SF의 거장 그렉 이건 단편집"
    매일 아침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나는 남자가 있다. 어제는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는 보석상이었고, 이틀 전에는 벽돌공이었으며, 그 전날에는 남성복 판매원이었다. 어떻게 한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옮겨 다니는지, 그 자신 말고 또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숙주들은 195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태어났으며, 모두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이다. 지난 22년 동안 시내 중심가에 있는 번호 자물쇠식 대여금고 안에 자신이 1968년부터 옮겨 다녔던 숙주들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을 정리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지만, 태어난 시기와 거주지를 제외하고는 숙주들 사이에는 어떤 뚜렷한 편향이나 패턴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펄먼 정신의학 연구소의 간호사가 되어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떠오른 어렴풋한 가설은 대여금고 속 기록에 적힌 숙주들과 그 사이의 전율할 만한 비밀을 암시한다.

    ‘작가들의 작가’, 하드 SF의 거장 그렉 이건의 새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유전공학, 나노과학, 위상수학, 고전물리학, 양자역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1990년대 초중반의 중단편들을 담은 이 책은 그가 데뷔 이후 첨단 과학 연구의 성과를 서사의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전도자’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왔음을 증명한다.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가상 공간에서 육체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의식을 가진 소프트웨어가 된 인류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유괴>, 우생학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블랙코미디처럼 풀어낸 <유진> 등 수록된 작품마다 인류 상상력의 최전선에 서 있는 거장의 압도적인 서사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표제작 <대여금고>는 SF의 ‘하드함’이라는 지점에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뚜렷한 차별점을 갖는데, 작가 테드 창은 “하드 SF 그 너머의 서정으로 나아간다.”고 평했다.
    - 소설 MD 박동명 (2024.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