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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2,000원, 171권 펀딩 / 목표 금액 1,000,000원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로 출간되었습니다. 
  • 2024-10-02에 목표 금액을 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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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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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노벨 평화상 수상 작가 엘리 위젤이 주목한 홀로코스트 문학의 심오한 지평
★ “우리에게는 잿더미로부터 과거를 일으킬 의무가 있다.” 역사의 밑바닥에서 진실한 기억의 예술을 펼쳐낸 극작가 샤를로트 델보 작품 국내 최초 출간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그 이후》는 프랑스 극작가 샤를로트 델보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경험, 함께 지옥을 겪고 살아남은 여성 레지스탕스들의 그 이후 삶을 서술한 실험적인 형식의 회고록이다.

델보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비시 정권하에서 반나치 활동을 하다가 1942년 3월에 체포됐다. 당시 그는 스물아홉 살이었고, 유명한 연극 배우‧감독인 루이 주베의 비서였다. 델보가 탄 아우슈비츠행 수송 열차에는 총 230명의 프랑스 여성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그중 49명이었다. 델보는 1945년에 귀환한 후, 25년의 시간을 두고 총 세 권의 ‘아우슈비츠와 그 이후’ 연작을 썼다.

델보가 귀환한 직후에, 27개월의 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쓴 1~2부 원고는 20년간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다. 델보가 출간을 결심한 것은 1965년, 자신과 함께 수송 열차를 탔던 여성들을 전수 조사해 《1월 24일의 호송Le convoi du 24 janvier》으로 엮어내면서였다. 개인이 아닌 여성들의 집단 기억으로 아우슈비츠의 진상을 드러내고자, 델보는 다른 생존자들의 삶을 옮기는 ‘증언 문학’ 형식의 3부를 기획‧집필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5~1971년 연이어 출간된 세 권의 회고록은 델보가 평생 기억과 지식, 언어의 문제에 천착하며 남긴 다수의 희곡과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기단이 되었으며, 국가 권력과 남성의 목소리로 쓰인 대문자 역사의 그림자로 남아 있던 여성들의 자리를 마련해 냈다는 평을 받았다.

선형성에 저항하는 서사 구조, 부서지고 잇따르는 말로 시와 산문과 구술을 넘나드는 표현의 방법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실험적인 예술의 형식은 ‘진실한 기억과 실존’에 관한 철학적‧정치적 화두의 측면에서 시대를 넘어 꾸준히 재해석되고 있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23년에 출간한 대담집 《살 만함과 살 수 없음The Livable and the Unlivable》에서 델보의 사례를 중요하게 인용하며 그로부터 오늘날의 폭력과 단절의 시대에 거주를 박탈당한 삶, 난민과 이주민을 둘러싼 언어에 관한 비판적 성찰을 이어 나간다.

한국어판에서는 본래 나뉘어 있었던 세 권의 책을 합본했으며 1부 제목인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를 전체 책 제목으로 삼았다.



편집자의 말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비르케나우로 향하는 수송차에서 샤를로트 델보와 동기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통상 가축과 짐의 자리인 뒤 칸에 함부로 실린 채,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며, 칼날 같은 바람을 맨몸으로 맞아가며, 머리가 박박 깎인 남루한 줄무늬 통옷 차림 여자들이,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행색은 더할 나위 없이 초췌하나, 목소리는 우렁차게, 있는 힘껏 목청 높여 노래를 부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예상치 못한 광경입니다. 과연, 델보는 눌러 씁니다.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어서.”

그녀들은 심지어 그곳에서 연극을 합니다. 매일 격렬한 노동과 험악한 학대에, 티푸스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읽고 싶고, 음악을 듣고 싶고, 극장에 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보았던 연극의 대사 한 줄 한 줄을 악착같이 떠올리고, 고된 일과 후 짬을 내 연습하고, 막사 한편에 간이 무대를 차려, 공연을 합니다. 그 두 시간 동안,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인육의 연기가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그녀들은 자신이 연기하는 세계를, 믿습니다.

거기 있는 자들이 인간임을, 저마다 고유한 이름과 고향과 관계와 맥락과 비밀과 꿈을 지닌 인간임을 잊게 하는 수용소의 일상 속에서도 그녀들이 끝끝내 살아 있었던 순간을, 그녀들이 자신들을 지켜낸 순간을 델보는 묘사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혹의 한가운데에서 그 순간들이 진흙 속 유리 조각처럼 기어코, 빛납니다. 카포의 눈 밖에서 울 수 있도록 륄뤼가 등뒤에 델보를 숨겨줄 때, 서로가 서로에게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과거를 들려줄 때, 그녀들이 돌아갈 날을 짐작하며 기약 없는 계획을 세울 때마다 저는 멈추어, 유리 조각을 삼키듯 힘겹게, 알지 못했던 그 얼굴과 눈빛과 표정을 기억했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그렇게, 마도와 비바와 륄뤼와 카르멘과 세실과 푸페트와 제르멘... 을 기억했습니다. 그녀들,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들, 누구보다 단단한 양심과 의지를 가졌기에 거기 가게 된 그녀들이 그 양심과 의지로 서로를 돌보고 살렸다는 사실을 또렷이 기억했습니다. 그러려고 델보가 이 책을 썼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여성들이 잊히지 않게 하려고, 그 불가해하고 부당한 죽음들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비극을 덮으려는 대문자 역사의 횡포를 멈추고, 자신이 목격한 인간과 전쟁의 밑바닥을, 본대로 무참하게, 보는 누구든 부서지고 나뒹굴 수밖에 없는 형상으로 펼쳐놓았다는 것을.

이 여성들을 영웅으로 추앙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상은 오히려 이렇습니다. “우린 조금이라도 이성적으로 보면 부서지지 않을 수 없는 너무나 연약한 조각들로, 허황되게 꾸며낸 희망에 매달렸다. 이성의 상실, 희망이라는 광기에 대한 집착이 우리 중 누군가를 구했다.” 델보는 치열하고 서늘하게 씁니다. 밑바닥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 근원으로부터 인간을, 삶을, 세계를 다시 묻는 것. 그것이 비극의 본질임을 이 긴긴 회고록은 새삼스럽게 일깨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통렬하게 다가오는 내용은 어쩌면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보다, 그 이후 이어진 삶에 관한 증언입니다. 여성들은 입을 모읍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고. 자신들을 “유령”이라 부르는 델보의 표현은 비유가 아닙니다. 자기를 잃지 않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전념을 다해 살아 있어야만 했던 거기와 “그날 그날인 일상, 자잘한 근심, 시시콜콜한 계획” 따위로 생의 감각이 흐려진 여기 사이, 건널 수 없는 괴리 속에서 그녀들은 표류했습니다. 남들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해야 할까, 라는 물음은 지금 이 세계는 어떤 기억을 권장하고 어떤 망각을 강요하는가, 라는 물음과 겹칩니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은 이 존재들이 제기하는 살아 있음의 딜레마는 그토록 많은 고통과 죽음을 딛고 지어진 지금의, 우리의 삶이 정말 살아 있는것인지를 비춥니다. 앞에 간 여성들로부터, 오랜 세월을 넘어, 온갖 질곡을 거쳐 비로소 당도한 그 질문에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제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편집자 박우진


책 속에서

“저것 봐, 저것 봐.”
처음엔 본 것을 의심한다. 흰 눈과 뚜렷이 구분된다. 마당 한가운데 그게 있다. 벗은 나체들이. 서로 맞붙어 줄지어 있다. 새하얬다. 눈 위에 있어 약간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하얀색이다. 머리는 완전히 밀렸고, 음부의 털은 뻣뻣하게 섰다. 시체들은 얼어 있다. 하얀데 손톱만 밤색. 위로 쳐들린 발가락들은 좀 우스꽝스럽다. 너무나 터무니없고 끔찍하게. (...) 이제 마네킹들은 눈 속에 누워 있다. 겨울 햇볕에 잠겨. 이 볕은 아스팔트 위 태양을 상기시킨다.
눈 속에 누워 있는 마네킹들은 어제의 동기들이다. 어제, 점호할 때만 해도 그녀들은 있었다. 다섯씩 정렬하여, 라거슈트라세 양쪽에 서 있었다. 그녀들은 작업장으로 출발했고, 습지 쪽으로 갔다.
어제 그녀들은 배가 고팠다. 이가 있어 몸을 긁었다. 어제 그녀들은 더러운 수프를 마셨다. 그녀들은 설사했고, 구타당했다. 어제 그녀들은 고통스러워했다. 어제 그녀들은 죽기를 희망했다. 이제 그녀들은 여기 눈 속에 벌거벗은 시체로 있다. 그녀들은 블록 25에 죽어 있다. 블록 25 에서의 죽음에는, 죽음에서 흔히 기대되는 고요도 평화도 없다.
- <마네킹>

눈이 굴절된 빛 속에서 섬광처럼 빛난다. 퍼지는 빛살은 없고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 빛만 있다. 모든 게 잘린 듯 날카로운 윤곽선으로 새겨져 있다. 하늘은 파랗고, 단단하고, 얼어 있다. 빙하 속에 갇힌 식물들이 떠오른다. 빙하가 수중 식물까지 얼려버리는 북극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린 그런 식물들처럼 얼음덩어리 속에 갇혀 있다. 단단하고, 잘린 듯 날카롭고, 투명해 마치 수정 같기도 한 얼음 속에. 그리고 빛이 이 수정을 관통한다. 마치 빛이 얼음 속에서 얼어버린 듯, 아니 마치 얼음이 곧 빛이기라도 한 듯. 우리가 이 얼음덩어리 속에서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우리는 신발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고, 발로 바닥을 굴러본다. 1만 5천 명의 여자들이 발을 구르고 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이 폐기된 환경에 있다. 이 얼음 속에서, 이 빛 속에서, 이 눈이 멀 것처럼 눈부신 눈 속에서 우리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얼음, 이 빛, 이 고요.
- <이튿날>

나는 다시 절망에 휩싸인다.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나가겠어?” 륄뤼가 나를 바라본다. 나에게 미소 짓는다. 그녀 손이 내 손에 살짝 닿는다, 날 위로하려고. 그리고 난 그녀에게 반복한다. 이게 다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가 제발 알도록. “분명히 너한테 말했어. 난 오늘은 할 수 없다고. 이번엔 진짜야.” 륄뤼가 우리 주변을 둘러본다. 지금은 어떤 카포도 가까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내 손목을 붙잡으며 말한다. “너 안 보이게 내 뒤로 와. 이젠 울어도 돼.”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수줍게 말한다. 분명 내게 이 말이 필요해서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다정한 독려라면 난 순순히 따를 테니까. 나는 내 연장을 바닥에 세우고, 손잡이에 기댄 채 운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이 새어 나와 내 뺨 위로 흐른다. 나는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 둔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이 내 입술을 적실 때, 짠맛을 느낀다. 나는 계속해서 운다. 륄뤼는 일을 하면서 망을 본다. 가끔씩 몸을 뒤로 돌린다, 그리고 그녀 소매로, 부드럽게, 내 얼굴을 닦아준다. 나는 운다. 나는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운다. 륄뤼가 나를 잡아당겼을 때 나는 더 이상 내가 왜 우는지 몰랐다. “이제 됐지. 자, 일하자. 봐 봐, 이제 되잖아.” 이렇게 착한 말에 난 내가 울어버린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꼭 엄마 품에 대고 펑펑 운 것 같았으니까.
- <릴뤼>

죽어가는 자들의 입술에서 장중한 말들만 흘러나왔을 거라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겠지. (...) 초라한 들것 병석에, 벗은 채 누워 있는 우리 동기들, 거의 모두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뒈질 거야.” 그녀들은 헐벗은 널빤지 위에 벗은 채로 있었다. 그녀들은 더러웠고, 널빤지도 설사와 이 때문에 더러웠다. 그녀들은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 마지막 말을 그녀들 부모님께 전하는 일 말이다. 부모님들은 장중한 무언가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 저속한 말은 최후의 말들을 담는 선집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나약해지는 건 허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뒈질 거야.” 그건 다른 사람들의 용기를 앗아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들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메시지가 될 만한 것을 하나도 맡겨놓지 않았다.
-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겠지>

처음엔, 우린 노래 부르고 싶었다.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습지에 가려지고 나약하게 부서지던, 이젠 그 어떤 형상도 떠올리지 못하는 단어들을 반복하는 그 연약한 목소리들에 마음이 얼마나 갈가리 찢어졌던지. 죽은 자는 노래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되살아나자마자 연극을 했다. (...) 놀라웠다. 우리 기억에 온전히 있던 몰리에르의 몇몇 대사들이 다시 솟구쳤다.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의 힘으로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놀라웠다. 왜냐하면, 다들, 정말 겸손하게, 자기만 돋보이려 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연기했기 때문이다. 허영기 없는 배우들의 기적. 문득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고, 상상을 되살리는 관객의 기적.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두 시간 동안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인육의 연기가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우린 우리가 연기하는 세계를 더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당시 우리가 유일하게 믿었던 자유, 이를 위해 앞으로 500일을 더 투쟁해야 했던 바로 그 자유를 향한 믿음보다 강했다.
- <처음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각자 자기들의 기억을 가지고 갔다. 기억의 그 모든 무게와 과거의 그 모든 무게를. 도착했을 때, 그 무게를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다 벗고 들어가야 했다. 인간에게서, 모든 걸 빼앗더라도 기억만큼은 예외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일단 인간에게서 인간 존재의 속성을 제거하면, 기억도 사라진다. 기억은 불에 탄 피부처럼, 조각조각 떨어져 나간다. 이렇게 헐벗은 채 살아남는다는 것을, 당신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게 바로 이것이다. 결국, 몇 사람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설명이 안되는 걸 사람들은 기적이라 말한다. 살아남은 자는 기억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가 이전에 소유하고 있던 것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유년의 추억, 그의 손재주, 그의 지적 역량, 그의 감수성, 꿈꾸고, 상상하고, 웃을 줄 아는 능력. 그가 거기에 들인 노력을 당신이 헤아릴 수 없다면, 내가 아무리 당신에게 그것을 이해시키려고 해봤자다.
- <질베르트>

나는 차가워진 그녀의 손을 꼭 그러쥔 채, 자책으로 괴로워했다. 소중한 제르멘, 네가 날 얼마나 도와줬는데. 내가 얼어붙었을 때, 네가 내 몸을 덥혀주었잖아. 네가 네 손을 빌려주어 내가 겨우 잠들 수 있었잖아. 그런데도 널 만나고, 너랑 이야기하고, 네가 어떻게 다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지 보러 올 시간도 내지 못했어 ― 그런데 있잖아, 나한텐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 그 후에... 그래, 시간이 있고 나서도 ― 내가 너한테 빚진 것을 말하려고 지금 온 건 아냐. 그냥, 내가 그곳에서 돌아왔으니까, 거기선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온 거야. (...) 수치를 느껴서는 안 된다. 후회를 느껴서는 안 된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와 함께 돌아온 것은 실비안이 아니라, 제르멘인데. 어제였나 그 전날이었나, 어쨌든 요즘에, 실비안은 이미 죽었으니까, 최근 며칠 사이에, 왜냐하면 실비안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제르멘은 여전히 너그러운 입매와 푸르게 빛나는 눈길과 그 눈 속의 선함과 다정함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 손 안에는 여전히 제르멘의 손이 있었다. 병중에도 그렇게 마르지 않아 부드럽고 통통한 그녀의 손을, 살집을 잃지 않고 그저 투명해진 손을 나는 잡고 있었다. 나는 제르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떠날 결심을 하지 못한 채, 마치 예전 거기에서 밤마다 잠들기 위해, 내 어머니의 손을 놓지 못했던 것처럼.
- <제르멘의 죽음>

그리고
돌아온 자들의 이런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돌아온 유령들을
어떻게 그랬는지 설명도 못 하는
이 돌아온 유령들을 믿으면
당신은 결코 영원히 잠들지 못할지 모른다.
- <산 자들을 위한 기도. 살아 있는 것을 용서하기 위해>

출판사 서평

★ “49명의 생존자, 이 다부진 여성들은 살아남기로 결의했고 서로를 돌보는 데 익숙했다. 그중 샤를로트 델보가 있었다.” -캐롤라인 무어헤드, 《아우슈비츠의 여자들》 저자
★ 국가 권력과 남성의 역사를 거부하고 동료들의 죽음과 끝까지 동행하며 ‘우리’의 목소리로 써 내려간 여성 서사


책을 다 읽고 나면 샤를로트 델보는 결코 한 사람의 이름으로 남지 않는다. 그녀의 수용소 기록에서 주된 주어는 ‘나’가 아닌 ‘우리’다. 걸을 때 서로의 팔을 잡고, 점호 중 서로의 몸을 문질러주고, 인간성을 잃게 만드는 일상의 와중에도 서로의 실존의 증인이 되어주고, 상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수시로 이름 부른 동기들 속에서 델보는 기억하고 쓴다. 그 밑바닥에서 여성들은 서로를 돌보았다. 그것은 생에 매달리는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서로가 없으면 곧바로 절망의 나락으로, 죽음의 유혹으로 떨어졌을 테니 말이다. 수용소에서 버틸 힘과 용기와 의미는 혼자서는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함께함이 델보를 살아남게 했지만, 동시에 그 이후의 생애 내내 죽음과 동행하게 했다. 동기들의 죽음은 생존자의 삶을 맴도는 유령이 되어 끈질기게 물어온다. 왜 더 강인하고 용감한 다른 여성이 죽었는지, 왜 하필 당신이 살았는지. 우리만이 알고 있는 우리의 진실을 우리 아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지, 말해야 할지, 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델보에게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죽음들에 대한 책임이다. 생전에 그녀는 자신에게 “잿더미로부터 과거를 일으킬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종종 말했다. 동기들의 죽음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귀환 이후를 담은 3부는 델보가 스스로 부여한 의무를 절실하게 행함으로써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다. 그녀가 옮긴 삶들은 국가 권력과 남성의 목소리로 쓰여온 거대 담론의 그림자다. 비극을 극복하고 진보하는 주류적 역사 서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실제로 이들 여성 레지스탕스들은 학력이 높지 않고 직업도 평범한 보통의 여성들이었다. (《1월 24일의 호송》에 따르면 230명 중 약 160명이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대다수가 주부, 농부, 사무직, 재봉사 등 노동계급이었다) 잔 다르크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양심에 의해 나선 이들이 약한 동기를 향한 매를 대신 맞고, 서로를 붙잡으며 살아남은 것은 공명심 때문이 아니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은 훈장이 아니라 악몽이, 질병이, 속세에서는 쓸모없는 지식이, 깊은 허무를 동반한 혜안이, 그로 인한 괴리와 고독이 되어 돌아왔다. 이전까지의 대문자 역사 속에 이 여성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델보가 영웅이 아닌 같은 희생자로서, 기억의 매개자로서 펼치는 치열한 증언 문학은 홀로코스트 문학 연구자 로렌스 랭어의 말마따나 생존자들의 ‘죽음 이후afterdeath’ 영역을 열어젖히며, 감히 눈 마주치는 독자에게 역사에 대한 심오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 “전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인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 말의 아름다움과 장면의 극악함을 동시에 포착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홀딩, 《우먼스 리뷰 오브 북스》
★ 진정한 존재를 이루는 기억은 무엇이고, 지식과 언어는 무엇을 하는가. 시대를 넘어 재해석될 가치를 지닌 예술적 형식


이 책의 동시대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그 실험적인 예술의 형식에 있다. 선형성에 저항하는 서사 구조, 부서지고 잇따르는 말로 시와 산문과 구술을 넘나드는 표현의 방법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툭툭 끊어지고 더듬듯 되풀이되고 입과 코를 틀어막힌 채 겨우 쉬는 숨 같은 문장들에서 발생하는 거칠고 강박적인 리듬은 내용과 틈 없이 엉켜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그것은 앎과 생각 이전에 몸으로 맞닥뜨린 폭력과 부조리의 속성 그 자체이자, 델보 자신의 말처럼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생존자의 윤리를 구현한 형식이다.

온 감각을 곤두서게 하는 이 몸의 언어는, 출간 당시에는 다소 난해하게 여겨졌을지언정 ‘진실한 기억’에 관한 철학적‧정치적 화두의 측면에서 시대를 넘어 꾸준히 재해석되고 있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델보가 언어와 맺는 관계, 그 “소멸, 침묵, 빔, 비서사적 구조”에서 살아 있으나 살 수 없는 괴리된 상태의 전형을 보고 이로부터 동시대 난민과 이주민의 삶에 관한 사유를 이어간다. 그는 대담집 《살 만함과 살 수 없음The Livable and the Unlivable》(2023)에서 델보의 사례를 중요하게 인용하며 이 폭력과 단절의 시대에 거주를 박탈당한 삶을 둘러싼 언어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그러므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극작가 델보를, 이 오래된 책을, 여성 레지스탕스라는 잊힌 과거와 함께 지금 여기로 소환하는 것은 그녀가 또 한 명의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 자로서, 가장 취약한 존재의 상태에 처해본 자로서, 그런 존재들 간 연대를 통해 살아남은 자로서, 우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무겁게 진 자로서, 그 이후 유예된 생의 시간을 똑바로 마주한 자로서, 델보가 언어의 실패와 분투하며 지켜낸 그 맹렬한 말들이 여전히, 아니 나날이 첨예하게 근원적인 삶의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그토록 애써서 돌아온 이 세계는, 그녀들이 그토록 품고자 했던 이 인류는, 정녕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를.

차례

추천의 글_그렇게 그들은 살아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목정원)

1부_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2부_쓸모없는 지식

3부_우리 나날들의 척도

역자 후기_몸의 정치, 몸의 시, 몸의 윤리(류재화)

출간 배경_샤를로트 델보라는 세계, 진실한 기억과 연대의 예술이 시작된 곳(박우진)

추천의 말

“그렇게 그들은 계속 살아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 짐짓 연기하며. 말하자면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나는 절망하기 좋은 시대에 델보를 다시 읽는다. 단지 환멸하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그들의 고통을 따라 걷는 일은 왜인지 나를 강하게 하므로. 아프지만 강해지므로. 아프고 강해지므로.(...)
몸을 갖고 살면서 몸들을 응시하는 일. 타인의 몸에서 발생하는 허기를 권태를 절망을 간절히 바라봄으로써 함께 겪어 내 몸처럼 이해하는 일. 그 감각을 델보는 얼마간 연극으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낸 시간을 우리에게 전한 것이다. 간절히 읽는다면 우리도 알게 될 테니. 죽어가는 이의 눈은 텅 비어 있지만 반짝인다는 것을. 땅으로 꺼질 듯한 당신의 발걸음이 어떤 날엔 희망을 향해 있다는 것도. 그 몸을 입어보는 일이 연극이라면. 피차 완전한 하나 됨은 불가능해도 열심히 응시하다 찰나의 정박을 이해하고 우리가 손을 잡고 뛸 수 있다면.”
― 목정원, 작가‧공연비평가

“당신들은 안다고 하지만 결코 알지 못한다. 고통은, 악은, 철저히 몸으로 온다. 델보의 글이 내겐 몸의 정치, 몸의 시, 몸의 윤리였다. (...) 번역하는 내내 델보의 강한 의지와 의연함, 타자에 대한 이해력과 여유, 사랑, 그리고 현실적인 인식과 냉정한 통찰, 감정 과잉에 빠지지 않 는 절제력을 깊이 느끼며 정말 사랑했다.”
― 류재화, 번역가

“델보가 언어와 맺는 관계, 그 소멸, 침묵, 빔, 비서사적 구조는 오늘날 난민과 이주민, 폭력과 단절 속에 살아 있으나 살 수 없는 삶들을 성찰하게 한다.”
― 주디스 버틀러, 철학자‧캘리포 니아대 버클리 교수

“통찰력 있고, 섬세하며, 신랄하다. 한마디로 탁월하다.”
― 엘리 위젤, 노벨 평화상 수상 인권 운동가‧작가

“극악무도함을 시적으로 정제한, 놀랍도록 아름다운 혼란의 미학으로 고통과 공포를 동결한다. 감각적 기억이 전후 삶에 부과된 유령을 살려낸다.”
― 로렌스 랭어, 홀로코스트 문학 연구자‧작가

“델보의 작품 전체가 ‘양심의 문학’이라고 불릴 만하다. 존재의 극한에서 쓴 이 글들의 말하는 방식은 말해야 하는 내용 때문에 중요하다.”
― 로제트 러몬트, 영어판 번역가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온 ‘죽음 이후(死後)’ 상태의 맥락에서 기억, 시간, 책임, 그리고 생존에 관한 델보의 미묘하고 복잡한 명상이 빛을 발한다. 이 강렬한 3부작은 모든 책장에 꽂혀야 한다.”
― 사라 호로비츠, 홀로코스트 문학 전문가‧요크대 교수

“이 시적 작품은 우리가 진실을 만지도록 돕는다. 우리에게 와 닿아, 모든 절망 너머의 절망 을, 순교를 느끼게 한다.”
― 프랑수아 봇, 《르 몽드》

“전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인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 말의 아름다움과 장면의 극악함을 동시에 포착하는 것이다.”
― 엘리자베스 홀 딩, 《우먼스 리뷰 오브 북스》

“델보는 자신의 동지들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비인간적 장면들에 인간성을 불어넣고, 여타 홀로코스트 문학처럼 철학적 사색을 펼치는 대신 수용소에서의 일상에 다가가게 한다. 심오한 증언의 방식이다.”
― 《커커스 리뷰》

작가 소개

지은이|샤를로트 델보 Charlotte Delbo
프랑스 극작가. 1913년에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7세부터 타이피스트와 비서로 일하다가 1932년 프랑스청년공산당에 가입하며 연극과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같은 공산당원이었던 조루즈 뒤다크와 1936년에 결혼했다. 연극에 관해 쓴 글이 저명한 연극 배우‧감독인 루이 주베의 눈에 띄어 1937년부터 그의 비서가 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 주베의 극단 순회공연을 따라 남미에 체류했으나 친독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를 척결하는 과정에서 친구가 사형 선고를 받자 “다른 사람들이 단두대에 올라서는 동안 혼자 안전한 것을 견딜 수 없다”며 1941년에 파리로 돌아온다. 그 이후 남편과 함께 공산주의자 그룹에 속해 나치에 반대하는 홍보 자료를 만들고 배포하다가 1942년에 붙잡힌다. 남편이 총살된 후 1943년 1월 아우슈비츠행 수송 열차에 오른다. 이 열차에는 레지스탕스 혐의로 체포된 230명의 프랑스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27개월간의 강제 수용 이후 종전 무렵인 1945년에 국제적십자사 스웨덴 지부로 이송되었다가 귀환했다. 1947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엔에서 일했고, 1960년에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앙리 르페브르의 조교로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 들어갔다. 1961년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의 식민주의 정책에 항의하는 청원서 모음집 《아름다운 편지Les belles lettres》를 출간했다. 1965년 이후 함께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탔던 여성들을 전수조사한 《1월 24일의 호송Leconvoi du 24 janvier》, ‘아우슈비츠와 그 이후’ 3부작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Auschwitz et aprés》 등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과 영향을 담은 책을 본격적으로 출간하기 시작한다. 평생 진실한 기억의 문제에 천착하며 《누가 이 말을 가지고 돌아올 것인가?Qui Rapportera Ces Paroles?》 《날들과 기억La memoire et les jours》 등 다수의 희곡과 에세이를 남겼다.



옮긴이|류재화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누벨대학에서 파스칼 키냐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철학아카데미, 대안연구공동체 등에서 프랑스 문학 및 프랑스 역사와 문화, 번역학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 《세상의 모든 아침》 《성적인 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달의 이면》 《오늘날의 토테미즘》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보다 듣다 읽다》,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 《기자 생리학》, 모리스 블랑쇼의 《우정》 등이 있다.


도서 정보



도서명: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분류:
국내도서 > 역사 > 역사학 > 역사학 일반
국내도서 > 역사 > 전쟁/분쟁사 > 1차대전~2차대전
국내도서 > 역사 > 테마로 보는 역사 > 여성사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연극 > 연극인/연극이야기
국내도서 > 인문학 > 인문 에세이

- 상세 서지정보: 122*190mm / 500쪽
- 출간일: 2024년 11월 15일 (예상)
- 펴낸 곳: 가망서사
- 정가: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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