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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류재화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0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

최근작
2024년 11월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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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출판사*제작사 사정으로 제작 지연 또는 보류중이며, 출간 일정 미정입니다.
“당신들은 안다고 하지만 결코 알지 못한다. 고통은, 악은, 철저히 몸으로 온다. 델보의 글이 내겐 몸의 정치, 몸의 시, 몸의 윤리였다. (...) 번역하는 내내 델보의 강한 의지와 의연함, 타자에 대한 이해력과 여유, 사랑, 그리고 현실적인 인식과 냉정한 통찰, 감정 과잉에 빠지지 않는 절제력을 깊이 느끼며 정말 사랑했다.”
2.
“당신들은 안다고 하지만 결코 알지 못한다. 고통은, 악은, 철저히 몸으로 온다. 델보의 글이 내겐 몸의 정치, 몸의 시, 몸의 윤리였다. (...) 번역하는 내내 델보의 강한 의지와 의연함, 타자에 대한 이해력과 여유, 사랑, 그리고 현실적인 인식과 냉정한 통찰, 감정 과잉에 빠지지 않는 절제력을 깊이 느끼며 정말 사랑했다.”
3.
글을 쓰겠다는 당신에게 H의 가호가 있기를! -엘렌 식수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을 읽고 글 류재화(번역가, 불문학) 그녀 H 운하임리히(Unheimlich). 그렇다. 익숙하고도 섬뜩한. 이런 것이 문학이다. 그녀도 그랬다. 그녀의 글쓰기도 그랬다. 그녀처럼 한다면 문학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엘 렌 식수의 얼굴은 한번 보면 절대 잊히지 않는 얼굴이다. 새 같기도 하고, 백조 같기 도 했고, 백합 같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강물 속 조약돌처럼 단단했고 그 조약돌 을 휘감는 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부드럽게 흐르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영감의 기 포가 발생한 듯, 순수한 발화의 기쁨이 터진 듯, 무한한 축제처럼 단속적으로 급히 서 둘러 흘러가는 물살 같기도 하였다. 파리 시테 위니베르시테르에 있는 메종 하인리 히 하이네에서 토요일마다 그녀의 프루스트 문학 강독이 있었고, 나는 친구 마리-크리스틴과 함께 그 강의를 들으러 갔다. 피곤함과 게으름을 이유로 몇 번 결석한 적 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리-크리스틴은 나의 결석을 탓하며, 그녀가 오늘 얼마나 “ravissante”(황홀하고도 매력적인) 했는지 아느냐며 만면에 여전히 도취된 기쁨을 지 우지 못하고 말했다. 사다리 H H. 그렇다, 엘렌 식수가 제안한 사다리 H를 가진다면, 우리도 문학을 할 수 있을 것 이다. ‘제발, 그러하기를…….’ 나는 H를 부적처럼 지니고 주문을 외우기로 한다. H라는 형상에서 글쓰기 수행의 세 가지 법도를 깨우친 그녀는 이미 언어 너머의 비밀을, 아니 비밀 너머의 언어를 직관하고 육화하는 주술 예술가 같다. H는 우선 자신의 이름 Helene으로부터 진동하여(그녀가 이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독자인 우리에게 H는 우선 엘렌이기도 하다. 헬렌이 아닌 묵음된 엘렌), 더 넓은 파장 을 일으킨다. H. I와 I 사이에 놓인 다리. 두 세계를, 두 언어를 진동시키거나 가르는, 전 도체이거나 부도체로 만드는 선. 신묘하게도 H는 정말 그렇다. 엘렌은 “글쓰기는 두 해 안을 잇는 통로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제, H는 오르고 내리는 유영의 행동을 유발하고 요구한다. 작은 어항 속 물고기의 유영처럼 일견 단순하고 순진해 보이는 이 움직임은 왜 이토록 부드럽고도 사무치는가. 고통스러운 시지프의 업보처럼 이 움직임은 왜 이토록 충격적일 정도로 단조로운가. 우 리 생이 그러한가. 올라감과 내려감을 반복함으로써만 전혀 새로운 차원을 확보하는 매혹적인 고통의 표식이자 기호 H. 글쓰기는 분명, 이렇게 시작된다. 엘렌 식수는 자신이 수수께끼 같은 애착을 가질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들은 모두 이 런 사다리를 빈번하게 오르내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특히, 내려오기란 곧 올라가기이다. 아니, 올라가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극단의 행위이다. 낙하, 잠수, 투신, 자살. 우리는 오 르페우스의 하강행을 안다. 에우리디케를, 그러니까 절대적 영감을 찾아 오르페우스는 저 어둠의 지옥으로, 밤의 밤으로 내려가지 않았나. 엘렌은 카프카의 하강을 우선 전제한다. 왜냐하면 이 하강이 이념이나 이론, 원칙이 아니라 너무나 다루기 힘든, 그러나 말하고 또 말해야 하는 실질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욕망하는 자에게 이 하강은 절실히 원하는 것이면서 몸서리치게 두려운 것일 수 있다. 검은 구멍, 심연에 빠지고 싶은 충동은 언제나 강렬한 유혹이면서 에테르 속에 용해될 것만 같은 죽음, 함몰되어 영원히 닫힌 죽음이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프카처럼 이렇게 말하게 된다. “너는 나더러 더 내려가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아주 깊이 내려왔어. 그런데도, 그 래야 한다면, 나는 여기 머물게. 멋진 곳이야! 어딘가에 제일 깊은 곳이 있겠지. 하지만 나는 여기 머물 테니, 더 깊이 내려가라고 다그치지만 말아줘.” 절대선 바로 그 앞까지만. 부드럽게 출혈되며, 즉각적으로 퍼지며 용해되는 이런 알 싸한 상상적 죽음 같은 하강 국면만이 그나마 감내할 만한 것이다. 이 상상적 죽음이 붕괴되고, 넘어서면 안 되는 절대선을 추월해 버리면, 과잉(exces)이 된다. 그것은 곧 파국, 파열, 아니 상상적 죽음이 아니라 상징적 죽음이다. 그것은 광기이다. 이 세계에 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 버림이다. 책은 그래서 완성되면 안 된다. 닫힌 죽음처럼 책은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엘렌 식수가 H에서 프랑스어 단어 ‘Hache’(도끼)를 떠올리고, 이어 카프카의 도끼를 연상하는 것은 더없이 자연스럽고도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도끼는 은유어가 아니라 상 징어이다. “더 깊이 내려가라고 다그치지만 말아줘” 하고 호소하던 카프카가 이번에는 “해치고 찌르는 책”을, 자살 같은 책을, 재앙 같은 책을, 그러니까 그 유명한 문장처럼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 같은 책을 써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 으니 말이다. 승리하고 싶으면서도, 늘 패배를 원하는 자처럼 자신의 한계선 이내에서 한없이 유영하고 배회하는 신중한 자가 결국 위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궁극의 글쓰기 가 터진다. 금기가 있기에 반드시 위반이 있을 것이고, 건널 수 없는 제한선이 있기에 반 드시 건너가게 되어 있다. 한없이 지연되는 내공술의 침잠이 H의 내려가기였다면, 도끼 는 올라가기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축약된 기쁨과 공포의 예고이다. 그렇다, 끊어내야 한다. 선을 넘어야 한다.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건너갈 때, 죽 을 때, 아니 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글은 터진다. 세 칸: 망자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 사다리 H의 부적이 내 온몸에 숙지되었다면, 이제 실질적인 수행이 수반되어야 한다. 엘렌 식수는 이것을 세 칸의 방으로, 그러니까 세 칸의 학교로 명명한다. 망자의 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가 그것이다. 망자의 학교는 우선 읽기의 영역이다. 읽기란 우리의 첫 스승들을 만나는 일이고, 그 스승들은 대부분 망자들이다. 망자들은 부재하는 현존, 그러니까 이마고(Imago)이다. 지금은 없는 자들을 읽는다는 것은 나와 동시대인이 더 이상 아니게 된 자들을 읽는다 는 것이고, 이때 갑자기 나와 내 앞에 펼쳐진 책 사이에 묘연한 거리가, 울컥하게 만드 는 거리가 의식된다. 그는 더 이상 없다. 아니다, 그는 이 책 안에 묻혀 있다. 이제 내가 읽는 책은 저 내세의 그 무엇이 되고, 그래서 한없이 숭고하고 두려워지는가 하면, 나의 독서 행위는 어떤 진중한 의식이 된다. 더 고개를 숙이고, 더 탐사하고, 더 발굴하며, 그 래서 더 복원하고 싶은 의지가 자라난다. 엘렌 식수는 어떤 망자를 읽는가? 어떤 스승을 두었는가? 아니, 어떤 “몰래 먹기”를 하는가? 프란츠 카프카를 읽는다, 마리나 츠베타예바를 읽는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읽는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읽는다, 안나 아흐마토바를 읽는다, 잉에보르크 바흐만 을 읽는다, 장 주네를 읽는다……. 엘렌 식수는 이 망자들과 우리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움이나 파괴가 아닌 사랑의 관계일 수 있고, 글을 쓰고 싶다면, 특별히 애착하는 이 망자들의 도움을 얻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꿈에 나타나 놀라운 선물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과시 적인 너무 많은 책 읽기보다는, 혹은 갈급한 허기로 우선 다급히 손에 쥘 뿐, 결국 먹지 않을, 몰래 먹지 않을 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할 망자가 필요 하다. 나약하고 어두운 나를 이끌어줄 라파엘로 천사가 되어줄 작가들만이. 우리는 읽기와 쓰기를 분리하지 않고 둘을 잇는 정교한 클립 장치를 발명하여 자기 만의 특별한 수련 행위를 할 필요가 있다. 내려감과 올라감이든, 들숨과 날숨이든, 이 읽기와 쓰기 사이에는 ‘다른 같은 것’, 또는 ‘닮은 차이’에 기반하는 다소의 시차적 불 연속성이, 그러나 결국엔 공시적이 되는 연속성이 있을 뿐이다. 하여, 읽기를 하면서 쓰 기를 전조하고, 쓰기를 하면서 읽기를 전조하는 행복한 이중적 삶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엘렌 식수는 책을 펼치며 집중하는 우리는 동화성의 행위를 하면서도 분리성의 행위 를 하는 것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책의 문을 열자마자 다른 세계로 들어가 서는 이 세계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므로, “읽기는 백주의 도피이고, 타인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읽기는 그래서 오로지 혼자 있으면서 혼자가 아닌 기이한 고 독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가능한 공간은 독서 말고 꿈에도 있다. 망자의 학교를 졸업하면, 이제 꿈의 학교로 진급하게 될 것이다. 문학의 작용, 문학의 기법이 궁금하다면, 글쓰기 학교가 아닌 꿈의 학교를 다녀보자. 우리 항온동물 모두가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꿈에는 우리 종의 모든 태초적 비밀이 보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꿈은 또 하나의 유영 공간으로 “비밀을 욕망하면서도 욕망하 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이 엉겨 흘러다니거나, 은유와 환유의 수초들이 자라나는 문학 의 바다이다. 보지 않아야 하는 것을 언뜻 보게 되거나, 예언자도 구술하지 못하는 것 을 직시하고 마주볼 수도 있다. 엘렌 식수는 내 영혼의 얼굴인 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고도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것은 혼비백산할 현시일 수도 있고, 진실의 타격 밑에 달걀 껍데기처럼 부서지는 그 어떤 폭로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망자의 학교가 벽 너머에 있었다면, 꿈의 학교는 침대 밑에 있다고 엘렌 식수는 말하 는데, 그렇다면 글쓰기 학교에서도 수련의 방법은 달라진다. 꿈의 학교는 우선 시작은 하지만, 도착하기를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훈련 지침이 따른다. 우리는 스스로, 내 몸으 로, 걸어가고 걸어가며, 자아라는 올가미를 하나둘 털어내 버리면 그만일 뿐, 목표라는 도착점에 이르면 다시 자아의 올가미에 붙잡히고 말기 때문이다. 랭보처럼 바람구두를 신고 한없이, 신발을 닳게 하며, 즐겁게 걸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아가 해체되고 파열하는 꿈의 학교를 다니다 보면, 이제 우리에게 더없이 잔인한 시간이 온다고 엘렌 식수는 예고한다. 끔찍한 것, 두려운 것, 뭔가 물질 적이고, 화학적인 것, 어떤 “순수한 공포의 요소”를 이루는 것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더 꿈의 심층에 닿는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마법의 단어들이 파편적으로 이따금, 더러, 생겨 나온다. 이것이 키워드가 될 수 있다. 글쓰기는 이런 심층에서 솟아나온 찌꺼기 같 은 부유물 덕분에 당장에라도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꿈 일기를 써볼 수도 있다. 머리카락, 손목, 어깨, 굽은 길, 모퉁이, 비탈 길, 검은 상자, 회전 중인 테이블. 나는 악몽을 꾼 날은 특히나 꿈에서 깨자마자 바로 이 여리고 부연 부유물들이 사라질세라 얼른, 재빨리 적어놓곤 한다. 그래야, 내가 알면서 도 모르는 영혼이 견인되므로. 명사부터, 오브제부터……. 엘렌 식수는 꿈의 학교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꿈을, 장 주네의 꿈을 특히 환기 하고 서술하며, 어쩌면 모든 문학의 배양지를 이렇게 구성해볼 것을 제안하는지도 모 른다. 글의 모든 원천인 이 꿈을 쓰는 작가들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엘렌 식수가 말할 때, 이미 그녀가 얼마나 독특한 무게를, 그러니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 생경하고 도 황홀한 밀도와 강도를 좋아하는지 우리는 짐작한다. 대수롭지 않은 수많은 기표들 을 그렇게 부유하여 현동시킬 뿐, 주제와 메시지로 포장하고 압박하여 단단한 콘크리 트 구축물을 만드는 문학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차린다. 현실에서 힘을 잃을 때, 허 무주의와 무기력에 빠져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을 때, 꿈 속의 그 섬뜩하고 생 경한 밀도와 힘에 의존해본다면, 서서히 글쓰기의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뿌리의 학교. 뿌리는 최고의 심층이므로 숭고한 근간이자 근원일 것 같지만, 엘렌 식수에게 그것은 우선 어떤 불결함이다. 절대 만져서는 안 되는, 먹어서도 안 되는 가증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므로 숭고한 근간이다. 새, 여성, 그리고 글쓰기. 이른바 ‘세계 바깥에 있는 것들’(immonde/immundus)은 더럽고 불 결하며 불순하다. 성서에서는 새가 그러하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여성이 그러하다. 그리고 글쓰기가 그러하다. 글쓰기는 장 주네가 말한 것처럼 “낮은 곳”(les domaines inferieurs)에 가서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쓰는 자들은 제일 힘들고, 제일 살기어렵 고, 제일 위험한 나라에 사는 자들이다. 새와 여성, 글쓰기. 이것은 하나의 등가어이자, 삼중의 층위어로 이런 운명은 현실 세계에서 너무나 걱정스러운 삶을 살게 되겠지만, 문학으로서는 어쩌면 너무나 치명적인 광휘일 것이다.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그렇 다, 기쁘게 불결하기. 엘렌 식수처럼, 다시 운하임리히(Unheimlich)하기.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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