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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강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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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백 년 동안의 진보>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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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아 보이는 시들이라 가볍게 읽어나가다가 맨 끝에 실린 「저녁나절이다」에서 생각과 마음의 발이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그만 나는 휘청거렸다. 한참 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의 휘청거림이 이 시의 어느 순간에 시인 자신이 겪었던 것임을. 「저녁나절이다」가 시로서 보여주고자 한 것, 그것은 시간과 시간의 사이, 그 시간들과 함께 열렸던 공간과 공간의 사이, 그것들의 “틈새”다. 그러나 이 시의 “저녁나절”을 단순히 낮과 밤 사이에 있는 틈새 시간으로 읽는 것은 이 시를 잘못 읽는 것이리라. 이 시에서 ‘틈새’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물리적인 간격이나 거리 같은 것이 아니다. 매끈한 표면에 생긴 균열이나 생채기 같은 것, 세계가 표면만이 아니라 내부로도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구멍 같은 것이 이 시의 ‘틈새’다. 보라, 낮과 밤이라는 표면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살갗이 터져 흘러나와 번지는 피 같은 저녁놀을 배경으로 낮의 빛과 밤의 어둠이 미처 그 터진 틈을 봉합하지 못한 사이에 잠시 드러났다가 곧 사라져버린, 낮과 밤 그 어느 쪽도 헤게모니를 쥐지 못한 시간과 공간의, 밤의 빛과 낮의 어둠으로 이루어진 저 세계 내부의 심연을! 예술로서의 시라는 것이 릴케가 “세계-내면-공간”Weltinnenraum이라고 불렀던 저 내부와 소통하려는 근원적 충동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 수 있을까? 내부는, 그러나, 신의 눈동자와 같아서 그것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 벼락과 해일 같은 그 무엇에 우리는 눈을 잃고 동시에 세계를 잃게 될 것이다. 「저녁나절이다」에서 시인은 세계의 심연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시인은 그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린다, “부적 같은 한 장의 그림”으로. 그처럼 시는 세계의 내부를 오히려 가림으로써, 낮과 밤이라는 표면이 가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림으로써 그것이 드러나게 한다. 그렇게 가림 자체가 드러냄이고 드러냄 자체가 가림인 말함의 방식이 시이며, 그런 말의 형상이 “부적 같은 한 장의 그림”(상형문자)으로서의 작품일 것이다. 「저녁나절이다」 이후에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 참 넉넉하게 꽤 소란하겠다, 한 편의 진정한 시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세계 표면의 뻔한 소음들을 잠재워야 할 어떤 침묵과 그 이후에 들려올 세계 내면 공간의 내밀한 수런거림을 다시 잠재워야 할 또 다른 침묵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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