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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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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그늘에 숨어 얼굴을 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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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혜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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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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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혜의 수필은 진지하다. 한 자 한 자 손으로 꼭꼭 눌러쓴 그의 언어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삶의 징표들이다. 그의 수필이 가지고 있는 표면적 언어들은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내면에는 언제나 따뜻함이 번져 있다. 인간적 온기가 녹아 있다. 그것을 그는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확실한 행복’들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의 수필은 편편이 우리들에게 ‘소확행’의 즐거움을 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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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
- 고은희의 몽돌바다가 있는 서정 수필
ㅣ
수필세계 작가선 41
고은희
(지은이) |
수필세계
| 2017년 12월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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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이 있는 풍경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은희 수필가의 두 번째 수필집 《몽夢》이 발간되었다. 수필집 표제를 ‘몽’이라고 쓴 것이 무척 흥미롭다. ‘꿈’이라는 고유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한자 ‘몽’자를 가려서 쓴 까닭이 궁금해진다. ‘꿈’은 그렇게 되고 싶다는 ‘꾸다’와 가깝고, ‘몽’은 지금 이 순간에 ‘취하다’, ‘젖다’와 짝이 맞는 말이다. 그러니 ‘꿈’은 미래지향적 의지의 뜻일 것이고, ‘몽’은 현실에 몰입하고 있다는 내적 정서의 표출로 읽힌다. 사실 고은희는 일에 젖어, 아니 몽에 취해 정신없이 오늘을 살고 있는 수필가요, 문화기획자이다. 울산 북구 정자 바닷가에 ‘문화쉼터 몽돌’이 있다. ‘몽돌’은 작은 도서관이고, 전시장이다. 콘서트장이면서도 강의실이기도 하다. 몽돌에서는 끊임없이 전시회가 열리고, 공연이 개최되고 축제가 펼쳐진다. 시인, 소설가, 수필가, 아동문학가, 낭송가가 드나들고 화가, 서예가, 조각가, 인문학 강사들이 초대를 받는다. 이곳 몽돌의 관장이 고은희다. 그로 인하여 한때는 한갓지고 외진 몽돌이 아침이면 윤슬로 더욱 눈부신 곳이 되었고, 밤이면 반딧불이들이 모여 환하게 불 밝히는 복합 문화공간이 되었다. 고은희는 지난 20년 가까이 기자생활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하다. 기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스스로를 위해서는 한 줄의 글도 감추어야 하는 사람이다. 다만 남이 이룬 일들과 이름을 높이 들어올리기 위해 손과 발이 분주한 사람이다. 언젠가 처연히 빗길에 서 있는 그를 보고 그가 우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이 지역의 문화예술인 중에 그의 붓끝을 스쳐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의 그늘에 들어와 잠시 비를 피해 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중략) 방짜유기 제작과정에 우개리라고 하는 것이 있다. 우개리는 수없는 매질과 담금질로 단련되어 빛나는 유기그릇이 된다. 이번 수필집 《몽》의 발간을 계기로 수필가 고은희가 더욱 단단해지기를 소망해 본다. 그는 우리 수필문단의 보배이고, 이 지역의 소중한 인물 자산이기 때문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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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인형
ㅣ
수필세계 작가선 38
이필선
(지은이) |
수필세계
| 2017년 10월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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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선의 민낯수필이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들
글의 힘이 크다는 것을 이필선의 수필을 읽고 다시 깨닫는다. 나와 이필선은 십 년 가까이 수필을 사이에 두고 문우가 되어 교유해 왔다. 더러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드문드문 인생사도 툭툭 주고받아 왔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이제 한 권의 수필집을 앞에 놓고 책장을 넘겨가면서 비로소 그의 내력과 속내 그리고 지향점을 알게 되었으니 글의 위력이 밥보다 차보다 크다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필선의 수필은 솔직하다. 그의 수필이 보여주는 매력은 민낯에 있다. 묘한 화장술에 기대어 은유와 상징이라는 문학적 장치에 고민하는 수필들에 비하면 그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편안함부터 배려하려는 용기가 돋보인다. 그의 수필을 읽는 내내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기에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라고 한 『월든』의 작가 소로우를 생각했다. 여기에 부합이라도 하듯 이필선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기꺼이 민낯을 선택했다. 민낯의 장점은 당당하다는 것이다. 태생부터 당당함이 주어지는 사람도 더러 있겠으나 이필선의 당당함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숱한 표정들을 섭렵하면서 체득한 자신감의 소산이다. 이 자신감이 글 속에 녹아서 볼 테면 보라하고 독자들의 눈을 휘감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필선의 수필은 작품 하나하나가 한 장면들이다. 이번 수필집은 마흔여덟 개의 장면이 모여 한 편의 인생스토리가 되도록 연출해 놓았다. 목차의 배열과 무관하게 그 슬라이드의 시작은 「그해 겨울」이고, 마지막 장면은 「월문정」이다. 첫 장면 「그해 겨울」을 읽고 난 후의 가감 없는 소감은 떨림이었다. 소재가 낯 선 것도 아니고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장면 속에 숨겨놓은 복합적 글의 표정들이 단번에 그의 글속에 빠져들게 했다. 마치 벽에 걸린 고호의 초상화나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바라보며 그 표정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찾아내는 기분이었다. 「그해 겨울」은 중학교 3학년 교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 앞자리로 나가 진학상담에 부산한데 한 소녀는 한쪽 구석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 그의 표정이 복합적이다. 작가는 그의 처지를 스스로 ‘분노’라고 하였으나 그 짧은 단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표정이다. 좌절, 소외, 억울 거기에다 두고 보자는 굳센 의지까지 표정에 얼비친다. 소녀는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와 낡은 나팔바지를 찾아 입고 같은 처지의 몇몇이와 대송리행 버스를 탄다. 간절곶 앞바다에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울고 웃는 그들에게서 개인사의 아픔을 넘어 시대의 표정을 읽는다. 다음은 「유성서림」이다. 장면은 방직공장 품질검사대 앞으로 바뀌었다. 나는 3교대라는 시간의 쳇바퀴를 돌리며 유월의 청춘을 소진하고 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학교였으나 몸뚱이는 공장 검사대이다. 긴 형광등 위를 거쳐 올라가는 허연 천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족집게로 실밥을 뜯어내고 붉은 색 분필로 불량을 매긴다. 로봇 같은 일상이다. 얼굴은 납덩이처럼 무표정하다. 작품 「유월」에서는 남자가 생겼다. 미대를 다니다 군에 간 남자다. 학생용 토큰을 사서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대학생 흉내를 내던 무렵이었다. 그가 다가올수록 자꾸만 뒤로 물러서게 된다. 공장에 다니는 것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고, 실업학교에 다니는 것도 숨겼던 터다. 먼저 결별을 선언한 것은 채이기 전에 밀어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었다. 그것이 내 자존심을 살리는 길이었다. 이필선의 수필은 자기만의 표정이 아니라 그 정서를 해체하고 확대한다. 나는 「유월」을 읽으며 속울음을 삼켰다.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도시를 불려온 내 누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나는 종일토록 골목 양지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다가 희미한 풀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곤 했다. 그 누나도 동네 시장에 갈 때나 나들이를 갈 때 흰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를 입고 학생 흉내를 냈었다. 「민달팽이」는 지하방에서 살던 때의 이야기다. 작가의 부부가 서울에 와서 첫 보금자리를 튼 곳은 대궐같은 부잣집 주차장에 딸린 구석방이었다. 주인집 여자의 금속성의 구두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온 뒤 셔터가 들려지고 잠시 후 시동 소리와 함께 창문사이로 배기가스가 몰려들던 방이었다. 첫돌 지난 아이를 데리고 상경해서 둘째를 낳은 방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뼛속의 힘까지 그러모아 사느라 이를 악물었다. 이필선의 삶이 늘상 고단한 표정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금비녀」는 그의 따뜻한 표정을 대변하는 수필이다. 이필선 수필의 또다른 매력은 낡은 고무줄처럼 늘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축축 늘어지는 수필만큼 재미없는 글도 없다. 그의 수필은 착 달라붙는 맛이 있다. 오래 매다 친 찹쌀떡 마냥 밀고 당기는 쫀득한 맛이 있다. 거기에다 의뭉스러움까지 더해 맛있는 수필이 된다. 「금비녀」의 배경은 시아버지가 계시는 사랑방이다. 철부지 며느리는 등을 붙이고 누워 몸을 지지는 중이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돌아보며 넌지시 묻는다. “메느리, 니가 머리를 길게 해서 쪽을 지고 있다카만 금비네 한 개 해주겠구만.” 물론 떠보는 말이다. 며느리도 아내도 볶음 머리를 한 것이 내키지 않아서 던져 보는 말이다. 며느리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아버님이 금비녀를 해 주신다면 이 메느리는 머리를 기를랍니다.” 거기다가 이 며느리가 덩치가 커서 두세 냥은 되어야 어울릴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농이 진담처럼 되어 버렸다. 며느리는 재차 “머리를 기를까요?” 하고 다가가고 시아버지는 마른기침을 흠흠 쏟아내며 말꼬리를 돌린다. 그 정경운 풍경이 겨울 구들장을 따뜻하게 데운다. 돌발적인 사건으로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 「봉선화」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피어 있던 봉선화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잘려나간 봉선화대 밑으로 연분홍 묽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이를 확인한 나는 요절을 내리라 마음 속으로 달려간 곳이 이혼법정이었다. 이혼사유는 “제가 심은 봉선화를 모두 베어냈습니다.”이다. 모두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하지만 나는 진지하다. 웃을 일이 아니다. 봉선화는 한낱 꽃무더기일 뿐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어쩌면 저 간절곶 앞바다에서 좌절에 몸부림치던 기억과 방직공장 검품대 앞에서 무표정 했던 나날들,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결별에 분노하던 일, 매연가스 몰려오던 지하방에서 이를 물고 꿈꾸어 왔던 희망과도 같은 것이 붉게 핀 봉선화가 아니었을까. 이 봉선화를 더욱 구체화 시킨 것이 「월문정」이다. 작가는 사방이 탁 트인 들판 한자락을 사서 농막을 지어놓고 ‘달빛이 문수산에 놀고 간다’ 하여 월문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뒤꼍에는 상록수로 울타리를 치고, 코를 벌름거리지 않아도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금목서도 심었다. 인생 공수래공수거라지만 빈손에 상념이 많으니 심고 가꾸는 욕심을 거부하지 않겠노라 한다. 유년 시절, 남의 집 잔치마당에서 어머니로부터 뜨거운 국 한 그릇 얻어들고 어서 훌훌 마시지 못한다고 야단을 맞던 난감한 표정의 소녀가 이제 월문정에 평상에 누워 달을 보고 콧노래를 부른다. 만사 부러울 것 없는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만하면 잘 살았다. 그 여유로움으로 인생사 수필집 한 권을 묶었다. 한 눈으로 일별해도 별 모자람이 없는 글이다. 수필가로서 어디가서 빠지지 않겠다. 그래서 나 역시 이필선의 수필을 좋아한다. 분명 나만의 취향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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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이 피는 자리
ㅣ
수필세계 작가선 37
하지윤
(지은이) |
수필세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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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윤의 꽃이야기가 있는 수필
우리가 수국을 어디에서 함께 보았던가. 석남사였던 것 같다. 6월의 한가한 오후, 모여서 수필읽기가 지루했던 우리는 문득 석남사로 산책을 나섰다. 절 마당에서 삼층 사리탑을 뵈옵고, 대웅전 옆 계단에 올라서자 왼쪽 화단에 수국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연보라색 파스텔톤의 풍성한 자태에 감탄을 하자 누군가 수국은 큰 꽃이 아니라고 운을 뗐다. 작은 꽃들이 하나하나 모여 저렇게 벙글어졌다고 했다. 뒤이어서 “수국의 꽃말이 ‘진심’이어서 내가 좋아하지요.” 해서 돌아보니 삼십 년 넘게 꽃을 만지고 살고 있는 하 작가였다. 그때 이미 그가 이번 수필집 『수국이 피는 자리』를 낼 것이라 짐작했다. 수필은 작가의 아바타다. 그러니 수필을 통해서 작가의 행적을 쫓아갈 수 있고, 속내를 들여다 볼 수도 있다. 하지윤의 수필은 꽃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꽃이 작가의 삶의 배경이 되고, 글의 중심 화소가 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꽃을 좋아하는 마음이야 타고난 성품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하 작가의 경우에는 조금 더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혹시 어머니로부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작가의 어머니는 서른아홉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그런 어머니가 마당 가득 꽃을 키우며 사는 데는 연유가 영 없지는 않을 것이다. 꽃은 부재의 대체재요, 떠나간 사람의 현신이라는 생각은 없었을까. 그런 배경들이 어우러져 작가 하지윤의 삶이 되고, 수필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윤의 수필은 ‘곱다’라는 평을 듣는다. 글도 곱고 사람도 곱다는 말을 제법 들었을 것 같다. ‘곱다’라는 말과 ‘화려하다’라는 말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겠다. 하지윤의 수필은 곱지만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작고 소박하다. 꽃을 만지는 사람은 스스로 감정을 크게 부풀리지 않는다. 글을 쓸 때도 소재를 크게 잡지 않고, 문장도 길게 늘이지 않는다. 절제와 여백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절제와 여백은 꾸미지 않는다는 말이다. 꾸미지 않는다는 말은 곧 진실성으로 이어진다. 하지윤의 수필이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고 쉽게 읽히는 까닭은 이런 소박한 언어적 장치들 때문이다. 하지윤의 수필은 따뜻하다. 일명 ‘행복수필’, ‘힐링수필’에 들어간다. 「살구꽃이 필 때면」, 「고향으로 가는 길」, 「오월」, 「옛길」, 「마중」과 같은 글을 읽어 가노라면 가슴에 온기가 퍼진다. ‘살구꽃 필 때’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을 그리워하는 수필이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천리 먼 길에 사는 숙부가 간절한 염원에도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는 애절한 사연이 있다. ‘오월’은 부모보다 더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할머니의 노후와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옛길’은 울산에서 밀양으로 넘어가는 가지산 고갯길을 말한다. 산허리에 터널이 생기면서 옛길은 차츰 잊혀져 갔다. 밀양에 사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에는 그 길마저 오르는 일이 드물어질 것이라는 안타까움의 소재를 다루었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그가 대상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애정을 쏟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아, 이 사람은 머리로 글을 쓰지 않는구나. 가슴으로 글을 쓰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미래의 수필은 분명 ‘인간의 존재와 가치문제’가 화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 회복에 테마를 둔 수필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지윤의 수필 등장은 참으로 시기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그의 수필은 회색빛 콘크리트 벽 앞에서,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갈길을 잃은 우리들의 거친 감정들을 어루만져 주는 치유와 위로의 묘약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윤의 수필이 늘상 ‘곱다’, ‘따뜻하다’라는 쪽으로 읽히는 것은 작가의 입장에서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자칫 ‘무미하다거나 변화가 없는 글’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지는 결과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수필집에 「임진강」, 「매미소리」, 「자리」, 「간극」과 같은 일군의 글들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수필의 확장성에 다행스런 일이다. 「임진강」은 분단의 아픔, 「매미소리」는 선탈을 꿈꾸며 이 시대를 견뎌야 하는 청년 실업문제를 적시하였다. 「자리」는 도덕적 관습과 가치관의 문제, 「간극」은 민족의 과제인 남북문제를 짚어보았다.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라고 할 수 있는 곱고, 따뜻한 서정수필과는 동떨어진 화소들이다. 하지만 소재의 편식에서 벗어난 다양성의 탐색은 그 시도로서도 이미 유의미하다 하겠다. 개인적인 취향이기는 하겠지만 작품 「안개꽃을 보면」을 읽고 느낌이 좋았다. 뒷맛을 길게 끄는 글이었다. 글의 각 요소들이 하나로 뭉쳐 탄탄하게 결합되었음을 한눈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중심 테마는 꽃이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풍경을 멀리 띄어 놓아 독자가 장면을 파악하기 쉽게 설정하여 글의 틀을 잡았다. 등장인물은 결혼문제를 사이에 두고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였으며, 스토리 전개도 언해피엔딩으로 반전을 주어 여운을 살렸다. 수필의 교술성을 상기하여 오늘날의 결혼을 첨언하여 주제의식을 튼실하게 갖추었다. 적어도 이 정도의 기량을 가진 작가이니 하지윤은 어디가서도 빠진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한 작품을 더 읽어보자고 한다면 「인절미」를 선택할 것이다. 이 글은 도입 부분에서부터 밀도가 탄탄하다. 글의 중심 소재인 인절미를 자근자근 풀어내는 서두에서 이미 독자들의 입에 침을 고이게 한다. 때는 시조모 제삿날이다. 시어머니가 친정에 온 딸과 시집에 온 며느리의 음복 보따리를 싼다. 찹쌀 인절미는 은근 슬쩍 딸의 보따리에 몰아 넣는다. 인절미 한 접시로 무어 그럴 것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천만의 말씀이다. 인절미는 이바지 음식으로 쓰인다. 부부가 찹쌀의 찰기처럼 궁합을 잘 맞춰 살라는 의미가 담긴 떡이다. 때로는 입마개떡이라 하여 친정에 왔다 돌아가는 딸의 손에 한 되쯤 보내기도 한다. 시집에 가서 입을 다물고 살라는 뜻이 있고, 시집 식구들에게 딸의 잘못에도 너그럽게 입을 닫아달라는 메시지도 들어 있다. 이런 것들을 담아내는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섬세한 심리묘사가 손에 눈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윤은 등단 10년 차를 넘긴 울산지역 중견 수필가다. 그의 수필은 따뜻하여 치유수필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만의 꽃이야기는 타고난 감수성과 섬세한 묘사로서 독자를 서정의 숲에 가둔다. 이런 기대 속에서 수필집 『수국이 피는 자리』가 발간되었다. 그의 첫 수필집은 분명 우리들의 눈을 높여주고, 그의 문학적 가치를 널리 확인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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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나리
ㅣ
수필세계 작가선 34
김아가다
(지은이) |
수필세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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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부재의 아픔, 그리고 성찰
아가다의 수필은 처연하다. 그의 글은 깊은 밤 소리죽여 울음을 삭이는 낮은 기도이다. 지나온 길에서 겪었을 상실과 부재의 아픔을 끌어안고, 스스로에게 쏟아내는 성찰의 고해 성사이다. 그의 수필을 읽어가노라면 수필이 얼마나 우리들의 통절한 아픔이며, 한 인생의 가슴에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내는 표출의 숨구멍인가를 알게 된다. 희나리는 젖은 나무 등걸이다. 끝내 타오르지 못하고 매운 연기만 내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 그리움의 존재이다. 그 처연한 잔영이 지금 꽃병 속에 꽂혀 있는 한 송이 마른 꽃으로 남아 있다. 하루 만에 시들어 버리고 누렇게 퇴색되어 버린 꽃, 그 마른 꽃을 잊지 못해 남편의 트렁크 팬티를 입고 잠자리에 드는 아가다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 달에 한 번 ‘딩동’하고 저 세상에서 보내오는 유족 연금의 메시지가 이승의 그를 눈물짓게 한다. 네 명이었던 가족이 이제 세 명이 되었다. 하나 있는 아들, 하나 있는 딸은 일찌감치 유학길에 들어섰던 바다. 해 저문 퇴근 길, 강변 산책로에서 한 노파가 오랫동안 목을 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야야, 이제 오나? 내 모가지가 빠질 뻔했다.”는 노파의 다정한 목소리가 저만치서 오는 아들을 마중한다. 같이 살면서 매일 보는 가족인데도 서로 반가워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아름답고 부럽다. 아가다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리움과 기다림이다. 그러나 딸은 이미 타국에서 뿌리를 내렸고, 아들도 이국땅에서 짝을 만났으니, 아가다는 혼자 홀가분하다. 아가다는 독실한 교인이다. 증조부모에서 이이온 4대 째의 믿음이고, 아들과 손자에게도 내려갈 절절한 신앙이다. 수필 속에 등장하는 J는 그의 안식처이며, 그를 살아가게 하는 빛이기도 하다. 그 J 앞에서 아가다는 이제 굳은 다짐을 한다. 인생살이에 어찌 화려한 주인공만 있을까. 더러는 고달프고 고독한 주연도 있으리라. 어떤 역할이든 주체가 되어 세상을 헤쳐 나가리라. 나를 위하여 막이 내릴 순간까지 내 안의 나를 만나기 위해 무대 위에 당당히 나설 것이라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느닷없이 불어 닥친 모진 바람이 등불을 끄고 내 앞길을 캄캄하게 만들 수 있다. 지나온 길에서 맞닥뜨린 상처와 가슴 아픈 사연들의 고백서인 아가다의 『희나리』는 우리들에게 살아가는 이유와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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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장미꽃잎이
ㅣ
수필세계 작가선 32
이경자
(지은이) |
수필세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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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의 손가락 이야기
이경자의 수필은 잘 숙성된 와인이다. 제대로 발효가 된 푹 익은 빵과도 같다. 그의 수필을 읽어가노라면 나도 일흔쯤의 나이에 저렇게 깊은 맛이 우러나고, 여유마저 넘쳐나는 글을 쓸까 하는 부러움이 앞선다. 어느 현자賢者가 이르기를 인생 일흔이면 두 눈으로 바르게 보고, 두 귀로 옳게 듣고, 두 코로 향내를 구별하고, 입으로는 거침없이 말하며, 몸에 든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데 막힘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경자의 수필이 바로 그러하다. 그의 수필은 보고 듣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다채롭기가 그지없다. 쌉싸름하다 싶으면 달달한 맛이 뒤따르고, 무미하여 맨 맛인가 싶으면 어느새 고소함이 입에 가득하다. 삶의 이력, 연륜이라는 것을 참으로 무시할 수가 없게 만드는 그의 수필이다. 수필이 작가의 자전적 보고서라면 나는 「열 개의 훈장」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비틀어지고 부풀어 오른 열 개의 손가락은 그의 인생을 대변하고, 그의 수필의 연원을 함축한다. 이경자는 네 토막의 인생을 살아왔다. 나는 그 네 토막의 인생을 ‘네 번의 환승換乘이 있었다’ 라고 말하고 싶다. 환승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고단함을 무릅쓰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차를 갈아타는 일이다. 우리 인생에서 점점이 찍어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과도 같다. 그 징검다리는 건너가서 지워버리는 과거의 허물이 아니라 인생의 종착지에 이르러 마침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는 퍼즐 조각 같은 것들이다. 이경자는 숙명여대 가정학과 출신이다. 그 세대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 대학을 다녔다면 모르긴 몰라도 있는 집안의 귀한 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학업을 마치고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상대는 언론사 기자였다. 의상학을 전공한 그는 남편의 박봉을 핑계 삼아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바느질에 나섰다, 첫 번째 환승이다. 그때부터 그의 열 손가락은 길고 긴 수난의 길에 들어선다. 아이를 갖고 남산만한 배를 안고 병풍 수를 놓기 시작했다. 온종일 앉아서 아래만 쳐다보고 수를 놓으니, 다리는 저리고 얼굴은 술 단지 같이 퉁퉁 부었다. 그 일은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 보겠다는 첫 번째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환승은 피아노 교습이다. 두 손가락으로 침선의 수를 놓던 그가 열 손가락을 동시에 쓰는 일로 발전하였다. 30년이란 긴 세월을 그는 하루같이 피아노를 두드리며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쳐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 명문학원 원장이라고 명성이 높아갈수록 손가락은 혹사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터전이 되었고, 자식들을 튼튼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세 번째의 환승은 ‘그림 그리기’다. 쉰의 중반에 그는 느닷없이 만학도로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학부를 거쳐 대학원에 진학하고, 강단에까지 섰다. 아홉 번의 전시회를 거치고 서양화가라는 이름표를 다는 동안 그의 오른 손은 더욱 흉하게 틀어졌다. 이제 그는 작가다. 오른 손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세 손가락을 이용해서 글을 쓰는 수필가의 길 위에 서 있다. 그의 삶은 ‘오른 손 수놓기’에서 ‘양손 피아노 치기’ 그리고 ‘오른 손 그림그리기’로 갔다가 ’오른 손 글쓰기‘로 점철되어오면서 한 번도 손가락을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가난했던 무관의 제왕은 지역 언론사의 관리자가 되었고, 두 아들은 치과의사가 되었다. 거기에다 치과의사, 인문학 박사인 두 며느리를 얻었다. 참으로 장한 열 개의 손가락이다. 갈퀴 같은 저 두꺼운 손가락들은 기어이 보상의 열매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가 건너온 네 번의 환승은 오로지 생활의 도구였고,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을까. 나는 오 년 전에 수필가 이경자를 처음 만났다.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 원색의 트렌치코트, 이사도라 던컨의 머플러 그리고 투사하는 눈빛, 투박한 돌직구의 사투리에 일순 압도되었다. 그리고 편편의 수필을 통해서 그가 먹고살기 위해 무작정 달려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순서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지만 수놓기, 피아노 치기, 그림 그리기, 그리고 지금은 수필을 쓰고 있다. 처음에 이 모든 것이 그냥 그렇게 내 삶에서 필연적으로 점을 하나 씩 찍고 가는 과정이거니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삶을 되돌아보니 어릴 때 막연히 하고 싶었던 그 생각이 하나씩 이루어져 왔다. 그리하여 그는 수필가이고, 화가이고, 음악인이다. 세 번째 수필집 『붉은 장미꽃잎이』에는 그의 인생을 한 폭 그림으로 완성하게 한 열 개의 손가락 이야기가 눅진하게 녹아 있다. 아득하게 어린 시절, 막연하게나마 꿈꾸어 온 것들을 이루어 낸 애틋한 사연들이 숨어 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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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와 고등어
ㅣ
수필세계 작가선 31
백금태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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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재현, 그 표정들
모두冒頭에 남의 집 내력을 들추게 되어 송구스럽기가 그지없으나 우리 문단에 이런 문인 가족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수필가 백금태의 남편은 대구문인협회장을 지낸 공영구 시인이다. 그 공 시인의 형 되는 분이 전 창원문인협회장 공영해 시조시인이다. 다시 공 시조시인의 형 되는 분은 영남수필문학회 회장을 지낸 공진영 원로수필가이다. 삼형제가 한 길의 문단에 서 있다. 더구나 이들 삼형제는 모두가 중등학교 국어 선생을 지냈고, 백금태 수필가 역시 초등학교 교사로 현직에 있다. 참으로 범상치 않은 인연으로 짜여진 가문이다. 공 씨 삼형제는 오래 전에 ‘방앗간집 아이들’이라는 공동문집을 발간한 바 있다. 어린 시절 삼형제는 방앗간집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방앗간집 아이들’이라 불렀다. 세월이 흐르고 이 호칭은 책 제목이 되었다. 문집의 표지 제자와 그림은 방앗간집의 두 딸인 홍규 씨와 한예 씨가 맡았다. 이 정도면 텔레비전 아침마당에 나와 남다른 가족사와 운명처럼 엮인 그들 사이의 문단이력을 세상에 알릴 만도 하지 않겠는가. 세월이 십 년 쯤 흘러 2011년에는 두 번째 공동문집 ‘방앗간집 아이들’이 나왔다. 거기에는 새로 합류한 백금태의 수필이 보태어졌다. 막내의 아내인 나는 결혼하면서 삼형제가 수십 년 동안 파놓은 우애와 문학의 연못을 바라보며 살아 왔다. 어깨너머로 넘실대는 물결이 좋았다. 나도 그 물결에 휩쓸리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수필을 들고 그 연못에 서서히 발을 담그게 되었다. 삼형제의 덤이 된 것이다. 백금태는 첫 수필집 자서自序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문학적 토양이 바로 삼형제에 있으며, 이제 그들의 덤이 되었다는 겸손한 고백이다. 겸손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만만한 작가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와 십 수 년 동안 문우가 되어 교유하면서 각고의 정진을 익히 보아왔던 터이다. 그는 수필공부 이태 만에 신춘문예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공무원문예대전에서는 삼년 동안 수필과 동화로써 수상의 영예를 안았으니 일신日新의 걸음으로 수필의 중심에 들어선 무서운 내공의 문사文士이다. 무엇보다 백금태는 수필의 본성에 충실한 작가다. 수필은 일상의 문학이다. 체험의 기록이요, 기록의 재현이다. 재현을 오늘에 해석하고, 그 해석을 내일에 적용하는 삶의 문학이다. 그는 이 수필의 원론에서 조금도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러기에 그의 수필집 50여 편의 글들은 한결같이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에서 시작한다. 다시 한 번 살펴 보건데 그의 글에 단 한 편도 산과 강과 바다와 같은 자연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그는 묘사를 위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그런 서정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수필은 세상사 만물상을 담은 인간학이다. 오로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과 이완 그러니까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기다림, 아픔과 안타까움이라는 서사적 구조에 주목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비로소 수필의 길이 따로 있고, 시의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필이 의뭉스럽게 변죽을 울리면서 느린 작법으로 가는 것은 종내에 독자의 입에서 딱 한 마디의 느낌으로 다가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그의 수필은 흥미진진하다. 천일야화의 하룻밤과 같은 반전의 묘미가 장치로 걸려 있다. 그의 수필은 애초에 화려한 수사적 기교를 무기로 삼지 않는다. 새로운 소재를 들고와 독자에게 느닷없는 신비로움을 안기지 않는다. 깊은 교훈적 깨우침이나 심오한 사유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건 생활의 문학인 수필에서 굳이 우선적으로 건드려야 할 과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의 수필은 철학이나 종교를 아우르는 진한 감동의 성찰이 있다. 봄날 움트는 새싹 같은 아이들의 미소가 있고, 슬픔의 강물에 발을 담그는 이웃, 비를 맞고 가는 짠한 뒷모습이 있다. 참으로 솔직하여 때로는 허방을 딛고 사는 자신의 민낯도 보인다. 나이 들어 귀가 어둔 시누이 ‘청통형님’의 토라진 투정에는 늙어서 서러운 내 할머니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던 어머니의 말만 믿고 덩달아 욕을 거들었다가 질책을 당한다는 ‘김치와 고등어’는 인간 심리의 묘한 이중성을 깨우치게 한다. 내 교실의 대책없는 말썽꾸러기가 허리 뒤에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포옹’에서 독자는 눈물이 핑 돌 수도 있다. 남편과의 연애사인 ‘행운다방’은 우리 모두가 건너왔을 절절한 청춘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방파제’, ‘어머니 보따리’에서는 가없는 부모의 애정을 공감하게 한다. 어린 제자가 막무가내로 내 우산을 돌려달라는 ‘우산’의 장면은 가끔씩 인생살이가 난감하다는 것도 알려준다. 백금태의 수필에는 참으로 다양한 표정들이 있다. 우리를 웃게도 울게도 서럽게도 처연하게도 아득하게도 만든다. 그의 수필은 눈으로 읽는 것도, 머리로 헤아리는 것도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글이기 때문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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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마당 이야기
ㅣ
수필세계 작가선 30
신성애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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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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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신성애를 만나면 손부터 살피게 된다. 그 굳은살 박인 손은 정직과 성실의 표징이다. 나와 가족을 위해 살아온 손이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 다른 이의 머리를 매만지며 기쁨을 준 손이다. 우리들의 쉼터이자 놀이터인 배꼽마당을 만들어 조물조물 입맛을 내는 손이다. 더욱이 세상살이에 상처 난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쓸어주는 글쟁이의 손이기에 고맙고도 귀한 손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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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경계
ㅣ
수필세계 작가선 29
안량제
(지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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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詩山과 느티나무
안량제 작가가 수필집을 묶는다. 작품을 미리 받아본 나로서는 만감에 젖을 수밖에 없다. 문학을 대하는 그의 눅진한 연륜과 강인한 의지가 참으로 감동적이다. 능히 후배의 귀감이 되고, 뭇 사람의 격려를 받을 만하다. 한편으로 여든에 이른 그가 쉽지 않은 창작과정과 때로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사무친 회억들을 무엇으로 밀고 가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그가 '시산詩山'이라는 호號를 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삼십 년도 더 전에 서예공부를 할 때 이름을 받았다고 하니 당시에 주신 분의 속내는 알 수가 없겠으나 '詩山'이라고 하여 '시적 서정을 닮은 산' 이라느니 '詩를 山처럼 쓰라'는 등의 원초적인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문『시경詩經』에 이르길 '詩란 마음속에 꿈틀대고 끓어오르는 그 무엇을 절실한 언어로 다듬어 내는 것'이라 하였다. 아마도 몇 년 동안 작가의 심중이 그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토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꿈틀거림이 산처럼 마음속에 쌓였으니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번 수필집을 4부로 나누어 놓았다. 1부는 먼 길 떠난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정조, 2부는 생사를 넘나드는 항암치료의 고통, 3부는 항일의병의 본산인 고향 의령의 유적 그리고 4부는 가난을 짐 지고 자식을 길러내신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회한이다. 작가는 애초에 글에는 문외한이었다고 했다. 글공부를 하게 된 것은 글쓰기 경험이 있어서도 아니고, 문학에 자질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갑작스런 변고로 아내를 잃고 그 울화를 삭이지 못해, 산으로 들로 헤매다가 그 응어리를 풀고자 찾아온 곳이 수필이었다. 작가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자라서 서른이 될 때까지 혼인을 이루지 못해 기다리다가 먼저 가신 부모에게 불효를 안겼다. 그러구러 아내를 맞아 살뜰히 집을 얻고, 달 밝은 날 거실에 나란히 누워 행복에 취한 적도 있지만, 어느날 아내는 한 마디 말문도 열지 못하고 떠나가고 말았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작가의 통한이 일련의 작품들 저변에 자욱히 깔려 있다. 흔히 잠결에 저 세상 가는 것이 소망이라고들 하지만 남은 자에게는 평생의 형벌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부부로 산 자들은 너나없이 서로가 떠나갈 때면 정을 떼기 위해서라도 한두 해쯤은 아니 한두 달이라도 서로에게 말문을 실컷 열었다 갈 일이다. 작가는 근년에 두 번의 대수술을 받았다. 머리뼈를 뚫고 종양을 들어내는 수술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은 자가 당한 투병생활은 외로움과 절망과의 대치였다. 생과 사의 지독한 힘겨루기에서 작가가 터득한 것이 '꿈의 경계'이다. 그는 살아온 인생이 꿈인 듯 현실이고, 현실인 듯 꿈이라고 한다. 세월은 모래성을 허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천 년의 탐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그의 수필은 말한다. 그리하여「둥지」며,「생명」이며,「말문」같은 글들이 마음 따사롭게 다가와 마치 장자몽 한 편을 보는 듯하다. 늘 작가의 형형한 눈매와 각단진 손짓이 무슨 근거에서 발로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알고 보니 작가의 고향이 경남 의령이다. 항일 운동에 깊이 뿌리를 내린 충의의 고장이요, 탐진 안 씨 집성촌인 설뫼가 그의 고향이다. 멀리로는 작가의 10대조인 지헌선조께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18장군 중의 한 분으로서 군자감 직분을 맡았었다. 조선말 을사조약 반대 상소를 한 수파공守坡公은 관직을 버리고 항거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교육을 선도하고 자주독립운동에 앞장선 백산 안희제는 항일지사 서훈을 받았다. 더구나 어린 나이의 작가가 일제의 수탈로 조부와 모친이 왜놈 순사에게 험한 곤욕을 치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였으니 당연히 그의 대쪽 같은 항일 의기가 수필집 곳곳에 배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끔 문학행사에서 안량제 작가를 뵌다. 큰 키에 적당히 벗은 이마, 그리고 성성한 머리의 그를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한 그루 나무를 생각한다. 오랜 세월, 고향의 동구 밖을 지키고 서 있던 나무, 때로는 무성한 잎으로 깊은 그늘을 펴고, 때로는 비바람 맞으며 홀로 서서 하염없이 우리들을 기다리던 느티나무를 떠올린다. 그 자별하고 당당한 나무를 닮은 작가의 삶이 궁금하였는데 이제 수필집 『꿈의 경계』가 그 답을 내어 놓는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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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포구기행
- 고은희의 발길 따라 걷는
고은희
(지은이) |
수필세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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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희는 정론직필의 기자이면서 만리문향의 수필가이다. 그런 그가 수년 간 발로 뛰면서 울산 포구길을 다졌다. 이제 수만의 우리들이 그 뒤를 좇아가면서 곳곳에 숨어 있는 풍광을 음미하고 주저리 열려 있는 전설들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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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ㅣ
수필세계 작가선 23
박동조
(지은이) |
수필세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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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치다 박동조의 수필 「거미」를 읽고 무릎을 쳤다. 「옹이」와 「직립」을 읽고 나서 또다시 무릎을 쳤다. 예사롭지 않은 글들의 연속이었다. 일상의 체험을 이리저리 쪼개고 붙여서 서정의 감동을 불러내면 일단 수작으로 평가받는 요즘의 수필에서 그의 수필은 그 경계를 지나 순수문학의 종착인 탐미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 그렇다고 박동조는 고상한 체험으로 독자를 현혹하거나 내밀한 구성력을 무기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에 충실한 작가다. 낯익은 체험을 그만의 풍부한 연륜으로 녹이고 녹여서 오래도록 내면화한 뒤 바둑판 위의 무수한 경우의 수처럼 누구도 예견치 못하는 스토리의 세계로 불쑥 독자를 이끌어 가는 것이 그의 장점이다. 박동조의 수필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꿈'과 '절망' 그리고 '희망'이라는 아이콘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의 언어는 유기적이고도 순환적 관계를 가지고 그의 삶에서, 수필에서 작동하고 있다. 우선 그의 '꿈'은 작품 「너머」에서 아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돌아보면 나는 늘 내가 있던 자리에서 너머를 꿈꾸었다. 산 너머에 용이 산다는 말을 믿었던 어린 날처럼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믿었다. 소리를 쫓아 어렵사리 도달한 세상에서 내가 본 것은 가시처럼 우거진 의심하는 마음과 불꽃같은 기세로 벌이는 생존의 다툼이었다. 미처 의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생존의 다툼에 뛰어든 나는 온몸이 찔리는 아픔을 겪었다. -「너머」에서 박동조의 수필을 읽으면서 슬픔에 잠기는 것은 그의 수필에 '절망'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꿈의 좌절은 그를 절망케 한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농군을 접고 고향을 등진 것도 절망이었다. 도시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밀려난 것도 꿈의 상실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절망'이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수필 속의 절망은 의미화 과정을 거쳐 독자에게 전이되어 공감의 화소로 활용되고 있다. 아무래도 박동조 수필의 문학적 가치는 '희망'이라는 아이콘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작품 「꼭대기 집」은 절망을 「희망」으로 승화시킨 작가의 삶을 은유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이다. 햇빛이 잘 드는 집을 구하는 것이 작가의 꿈이었으니 봄이 오는 길목에서 전망 좋은 꼭대기 집을 구입하게 된다. 하지만 여름이면 한증막 같은 더위에, 겨울이면 감내할 수 없는 추위를 견뎌야 한다.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세월이 꼭대기 집의 계절 변화와 다르지 않다. 그나마 한 해 중에 절반은 평화를 누릴 수 있으니 그게 어디냐고 위로를 한다. 겨울 끝에는 봄날이, 여름 끝에는 가을이 틀림없이 온다는 것도 희망이 아니냐고 지친 나를 토닥인다. -「꼭대기 집」에서 절망 극복의 시리즈 작품으로 「각」을 빼놓을 수가 없겠다. 사실 이번 수필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을 꼽는다면 선뜻 「각」을 추천하고 싶다. 이 작품은 남편의 조각 활동을 소재로 삼고 있다. 세상의 아픔을 오로지 조각의 완성에 의지하는 작중 주인공의 예술혼이 언뜻 김동인의 「광화사」와 정한숙의 「금당벽화」에 이어지는 것은 마냥 억측일까? 「각」과 더불어 「옹이」에서도 집요한 예술혼의 추구는 일군의 작품들이 예술지상주의에 접목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유미주의는 '예술을 위한 예술(I'art pour I'art)'을 목표로 예술 속에서 미적 쾌락을 추구하는 문예사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의 이러한 경향은 서정이나 서사에 머물러 있는 우리 수필에 순수 본격수필의 새로운 수확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박동조의 수필은 문학적 밀도에서 작품 간의 편차가 적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꼽힌다. 그만큼 작가로서의 내공이 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기에다 수련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천부적인 언어 맵시와 사전 속에서 잠자는 우리말을 끊임없이 깨워 세상 나들이를 시키려는 노력이 작품의 격을 높여 주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놓고 싶다. 아마도 수필집을 일별한 독자들의 반응이 이를 증명하리라 믿는다. 신예의 첫 수필집을 두고 과한 찬사라고 딴지를 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참한 수필가 한 사람을 찾았으니 아프도록 무릎을 칠 만한 오늘이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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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피
ㅣ
수필세계 작가선 14
김희자
(지은이) |
수필세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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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성(恒星)
김희자는 수필문단의 신성(晨星)이다. 공연한 치하가 아니라 그의 화려한 등단 이력이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이게 한다. 그는 2009년 천강문학상과 목포문학상을 동시에 석권하며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두 문학상은 신인들의 권위 있는 등용문을 겸하면서 기성 작가들에게도 기회를 열어놓은 공모전이기에 치열한 검증을 거친 그의 수상은 더욱 영예롭게 평가한다. 하지만 아침마다 스러지는 샛별이란 얼마나 겸연쩍은 존재인가. 이에 그는 일찌감치 부단한 단련으로 스스로의 자리에서 빛을 내는 항성(恒星)이 되고자 하였다. 아마도 수필집 『등피』가 이를 증명할 것이다. 『등피』에는 44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을 편의상 4부로 나누어 놓았으나 전체를 조망해 보건데 '아픔' - '벗어나기' - '회귀' 로 이어지는 3단계의 모티브로 읽혀진다. 이러한 작품집의 구도는 평소 작가의 문학적 형상화의 작업이 얼마나 치밀하게 시도되고 있는지 가늠하게 한다. 꿈은 하찮아도 고왔던 유년을 보내고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도시로 나왔다. 학업과 직장생활을 겸했던 이십 대 중반에 둥지를 틀어 아기자기하게 살았다. 한창 다복해야 할 나이에 갈 길을 잃어 마음이 아득할 때가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기도 했었다. 쓰라림과 목마름으로 눈시울이 붉어져 살아갈 때 나를 찾게 한 것은 문학이었다. 작가는 머리맡에서부터 주된 정조를 지독한 아픔으로 설정하였다. 작품에 즐겨쓰이고 있는 '길' '강(江)' '터' '둥지'와 같은 주제적인 낱말들에도 상처와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 작품을 살펴보아 그의 아픔은 치유될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일 수도 있고, 경각에 달린 생명줄을 부여잡던 아득한 절망일 수도 있다. 물이 새는 둥지를 지켜내지 못하여 젖은 몸을 떨던 체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수필은 이처럼 앙금의 문학이다. 이처럼 느닷없이 닥쳐온 비운의 파편은 앙금의 덩어리로 석화 되었다가 아픈 수필로 되살아 나는 법이다. 작품집 『등피』의 절반에 가까운 글들은 '기행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해무', '공(空)', '구룡연 가는 길', '공명(共鳴)', '국밥', '녹비'를 비롯하여 십 수 편이 여기에 포함된다, 일탈은 현실의 아픔을 방어하는 유용한 기재이다. 특히 혼자만의 외로운 여행일 때 묵언은 익숙해지고, 스치는 대상들에게도 세밀한 시선을 보낼 수 있다. 김희자의 수필이 사색이나 관조에 능하다는 평가도 여기서 비롯된다. 묘사적 표현에 탁월하다는 말에도 이런 이유로 수긍을 하는 것이다, 더욱이 기행의 틀 속에서 작가가 유유히 '달못'을 거닐고, '낙화'에 정신을 놓고, 절집에 앉아 '황국차'를 우리는 장면을 읽어갈 때 작가가 쓰라린 트라우마를 눅진하게 녹이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를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김희자의 수필에서 일군을 이루는 '모티브'는 단연 다랭이 마을이다. 남해시 가천 다랭이 마을은 작가의 고향이다. 다랭이 속에는 그의 대표작인'등피'의 어머니가 살고, '저무는 강'의 아버지도 있다. 작품 '뒷짐', '상수리나무'. '아궁이', '갯벌'이 있다. 고향은 '태'요, '터'요, '둥지'이다. 안식처이다. 안식은 아픈 자와 지친 자에게 소생의 근원이 된다. 그런 까닭에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도시로 떠난 작가의 정신적 회귀와 공간이 다랭이 마을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다랭이 수필가로 불리는 것을 염원으로 삼기까지 하고 있다. 김희자는 애초부터 문학적 재능을 뽐내거나 지나간 문청시절을 회억하며 문단에 이름을 올린 수필가가 아니다. 한때나마 지독했던 일상의 아픔이, 근원적이 노스탤지어가 그를 수필 판에 불러들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수필이 고상한 세련미에는 다소 어두울 수가 있을 것이다. 능란하게 현학을 피력하는데도 서툴 수가 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문학이라는 수필의 본래적 진실성에 오로지 순응하는 수필가이다. 부디 그이 수필집『등피』의 일독을 권한다. 김희자는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며 빛을 내는 항성(恒星)이 되고자 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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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ㅣ
수필세계 작가선 21
신노우
(지은이) |
수필세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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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노우의 수필은 더운 여름날, 금방 씻고 나온 민낯처럼 신선하다. 방금 들일을 다녀온 남자의 손처럼 수더분하다. 사소한 일상에 화려한 덧칠로 수필의 감동을 강제하는 작품집을 더러 본다. 하지만 신노우의 수필집처럼 삶의 총체적인 덩어리가 문학적 감동으로 전이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의 반듯한 생각과 삶은 문학적인 의미화에 성공했다. 가식이 없는 일상 리얼리티로 표현된 수필집 <살며 생각하며>는 그래서 더욱 가독성이 크다. 그의 수필은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한 공무원이자 한 어머니의 아들, 모범적인 한 가장, 아버지의 일상이다. 해박한 지식과 지혜를 널리 전달하는 충실한 농업 전문가로서, 또 문학인으로서 수필가 신노우의 바빠질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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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레따
- 3인의 감성계절 서화집
전건숙
,
이서원
,
김해자
(지은이) |
수필세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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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레따는 러시아에서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로 들어서는 시기에 두 주간 정도 머물러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연유하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바비레따라고도 한다. 서화집을 어떻게 내게 되었느냐는 말에 '그냥'이라고 하던, 시인과 화가 그리고 수필가는 어떻게 얽힌 인연들일까. 나는 그들을 늘 가을에 만난다. 그들은 붉은 빛의 노을 배경으로 붉은 와인 잔을 들고 붉은 연정에 빠져 있는 모습들이다. 시인, 화가, 수필가 세 사람은 지금 인생의 가장 화려한 계절, 감성의 계절, 바비레따에 살고 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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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무늬
ㅣ
수필세계 작가선 22
류현서
(지은이) |
수필세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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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과 고뇌, 그 너머의 깊은 사유들 수필가 류현서는 만학(晩學)의 문인이다. 예순의 언저리에서 등단하였으니 수필 문단이라 해도 올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문학 공부 이 년 만에 신춘문예작가 대열에 올랐다. 그 짧은 기간에도 여러 공모전에 입상하여 문학성을 검증 받았다. 그리고 등단 이태째에 수필집을 묶었다. 늦게 시작하여 남보다 일찍 이루었기에 그의 이름은 영예롭다. 그는 시조 시인을 겸하고 있다. 중앙시조백일장 입상과 월간문학 신인상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력이 아니다. 서로 작법을 달리하고 있는 수필과 시조를 동시에 나누어 잡고 있다는 것은 창작의 고뇌를 가열차게 즐기고 있다는 반증이다. 지금 수필가와 시인으로서 그의 위치는 불과 사 년 만에 얻은 결실이다. 류현서의 수필에는 해학이 짙게 깔려 있다. 읽고 웃는 즐거움이 있다. 아무리 풍성한 체험이라도 듣는 이를 싱겁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알 같은 일상도 살을 붙여 너끈히 미소를 짓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스스로 재담꾼이라고 자서에서 밝힌 바 있다. 재담은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 가는 힘이다. '춤추는 장롱'은 이런 해학의 작품들을 대변하는 글이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숨을 거두었다. 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과 시어머니는 장롱을 돌려놓았다. 가까이 사는 친척들이 비보를 듣고 달려왔다. 사람이 유명을 달리한 안방에는 장롱이 허옇게 뒤통수를 내밀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장롱이 왜 이러냐고 물으니 시어머니의 말이 가관이었다. 이렇게 해야 재혼할 상대가 곧바로 생긴다는 것이다. 장롱을 돌려놓는 체험은 작가가 찾아온 기본 글감이다. 사건이 여기에서 끝났다면 맛없는 재담이 되고 말 것이다. 이 화소는 장롱을 돌려놓는데 황망해서 죽은 사람의 코와 입을 먼저 막지 않아서 되살아난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여기에서 끝난다면 그야말로 재담꾼의 명성은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본인의 집을 지을 때 아예 붙박이장을 해놓은 것으로 해학을 마감한다. 블랙코미디다. 웃음이 슬픔으로 진화되는 순간이다. 아무래도 류현서의 수필 재미는 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아픔(Tragedy)은 고래로부터 문학의 근간이 되어 온 모티브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왜 수월한 길을 바라지 않겠는가.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푹신한 흙 속에 발을 뻗으며 살고 싶지 않으랴. 운명인지 숙명인지 알 수가 없지만,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나날들, 순간순간 앞이 막막했던 기억들, 여기 반송을 보면서 긴 숨을 내쉬게 된다. 내가 나를 읽지 못한 흘러간 날을 오늘에야 다시 읽어 보게 된다. 반송 아래서 한참을 서성인다. 왔던 길 되돌아보니 꿈인 양 아득하다. ―「영산암의 반송」 작품집의 표제가 되는 「지워지지 않는 무늬」, 「뜸부기」, 「열암계곡을 찾아서」, 「영지」 등 일련의 작품 군은 십 년 넘게 아이를 가지지 못해서 생긴 생채기들이다. 소재를 달리하여 「달개비」,「돌꽃」, 「인동초」들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다. 첨언해 둔다면 작품집 속에 제목을 달리하면서 유사한 작품이 연이어 수록되는 것에 대해 굳이 지적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고뇌의 흔적을 지워질 때까지 반복해서 지워 보는 작업 또한 수필의 영역이다. 수필은 앙금의 표출로써 여타 장르에서 다룰 수 없는 직접적인 자기 치료의 기능을 가지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류현서는 의미화에 능숙한 수필가다. 그는 어디에서든 낯익은 보조관념을 불쑥 끌어와 자신의 생소한 원관념을 가치 있게 포장하여 독자들 앞에 내어놓는데 탁월한 감각을 가진 작가다. 「바디와 북」이 대표적인 사례다. 남편이 북이라면 나는 바디가 아니었나 싶다. 천지 사방 옷자락을 휘날리며 다니는 남편이야말로 매끈한 몸으로 바람처럼 베틀을 누비는 북과 다를 바 없다. 밤낮없이 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속을 태우는 나는 베틀에 매여 있는 바디와 닮은꼴이다. '등 굽은 아버지'를 소에게 등짐을 실을 때 얹는 「길마」로 형상화한 것도 그러하고, 외곬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삶을 물고 물리는 「지퍼」로 이미지한 것도 그 예가 된다. 류현서는 폭넓은 체험과 비판적인 해학성, 대상을 분석하는 의미화 기법, 거기에다 구수한 문장 구조력 등을 두루 겸비한 장점 많은 수필가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앞선 걸음으로 사유 깊은 첫 수필집을 상재한 그의 행보에 큰 주목이 따르기를 기대한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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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발자국
ㅣ
수필세계 작가선 17
설성제
(지은이) |
수필세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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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바람의 발자국??을 읽어가는 동안 풍경화 한 점을 뇌리에 각인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의 풍경화는 현란한 색조로 겉칠을 한 횡적 파노라마가 아니었다. 오로지 흰색과 검은색만의 조합으로 한없이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내면의 풍경이었다. 마치 그의 부친이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며 수필집의 배경으로 내어준 수묵화 몇 점처럼 그의 은밀한 내면을 수줍게 드러낸 무채색의 풍경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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