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그리는 일이 무서웠다. 내가 파도를 어떻게 종이 위에 담는다지?
하루는 그저 종이를 노려보기만 했고 하루는 종이를 책상 위에 내버려 둔 채 도망쳤다.
하지만 내가 그리지 못한 파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나를 기다렸다.
이 책의 화자가 자신에게 새로운 바다를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나에게 그러고 싶었다.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 없이 가장 연한 연필을 들어 종이 귀퉁이에 끄적거렸다.
그다음 날은 조금 더 귀퉁이에서 벗어났고 그렇게 1cm씩, 한 뼘씩 그려 나갔다.
그렇게 모인 물결이 파도가 되었다.
물결 하나하나는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둥글고 뾰족하고 밝고 어둡다.
도저히 어떤 모양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모양도 있다.
규칙성 없이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듯 그림에 몸을 맡기다 보니
어느새 이 책이 나의 새로운 '바다의 얼굴'이 되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고 오래 망설이게 되더라도,
영영 잊히지 않을 기억들로 문득 슬퍼지더라도
결국 모두 각자의 바다를 마주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