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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아흐마둘리나(Bella Akhmadulina)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Андрей Вознесенский), 불라트 오쿠자바(Булат Окуджава), 예브게니 옙투셴코(Евгений Евтушенко)와 더불어 1960년대 ‘새로운 물결’을 타고 등장한 시인이다. 보즈네센스키가 전위파 시인으로, 오쿠자바가 음유 시인이자 통기타 가수로, 옙투셴코가 저항 시인으로 인기와 명성을 얻고 있을 때, 아흐마둘리나는 배우로, 시나리오 작가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다재다능한 탤런트 시인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보즈네센스키의 실험시나 옙투셴코의 참여시와는 대조적으로 아흐마둘리나는 서정성 짙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시로 1960년대부터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벨라 아흐마둘리나는 1937년 모스크바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몸속에는 몽골인과 이탈리아계 러시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젊은 날의 모습은 동양 미인을 연상케 했다. 1954년 그녀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시인 옙투셴코와 결혼했다. 고리키 문예전문대학을 다니던 1959년에는 파스테르나크 비판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으나, 그 후 복학해 1960년에 졸업했다. 그녀는 작가동맹 회원증을 얻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시의 번역, 특히 그루지야 번역시의 탁월성을 인정받아 겨우 작가동맹 회원이 된 이후부터 그녀는 자기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1962년에 첫 시집인 ≪현악기(Стурна)≫(1961)를 발표했는데, 이 시집은 사랑, 영감의 문제, 과거 등 다양한 테마를 다룬 간결한 서정시로 좋은 평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유명한 단편소설 작가 유리 나기빈(Юрий Нагибин, 1920∼1994)과 함께 그의 작품 <맑은 샘>을 시나리오로 개작하다가 그와 재혼했다. 1963년에 첫 번째 장시 <비 이야기>의 일부가 문예지 <그루지야>에 발표되었고, 다른 한 편의 장시 <나의 가문(Моя родословная)>(1964)이 잡지 <청춘(Юность)>에 발표되었다. 이후로 그녀는 시 창작보다는 시 번역에 더 열중했으며, 그래서 두 번째 시집 ≪음악 수업(Уроки музыки)≫(1969)에서는 새로운 창작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1970년에 들어와 다시 적극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면서 12월에 시인 파벨 안토콜스키와 함께 작가들이 즐겨 찾는 ‘모스크바 우정의 집’에서 저녁 시 낭송회를 열었다. 계속해서 그녀는 ≪시(Стихи)≫(1975), ≪촛불(Свеч-а)≫(1977), ≪그루지야의 꿈(Сны о Грузии)≫(1977), ≪눈보라(Метель)≫(1977), ≪비밀(Тайна)≫(1983) 등 많은 시집을 꾸준히 발표했다. 나기빈과 이혼하고 무대 디자이너인 보리스 메세레르(Борис Мессерер)와 결혼한 아흐마둘리나의 젊은 시절은 화려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대중 스타였다.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과 친숙한 그녀의 시 낭송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낭송 예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은 사랑을 노래한 옙투셴코의 초기 시에 잘 나타났다. 아흐마둘리나 자신도 자신의 특징인 붉은 단발머리의 모습을 시에서 자주 언급했다. 모스크바 콘서트홀의 무대에 붉은 머리의 미인 아흐마둘리나가 하이힐을 신고, 최신 패션의 몸에 꽉 끼는 검은 실크 옷을 입고 나오면 청중들은 매혹되어 조용해졌다. 그녀가 커다란 눈을 가진 인형처럼 비스듬히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자작시를 낭송할 때면,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선율이 흐르는 듯, 슬픔에 젖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이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여류 시인이었으며 스타였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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