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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자는 산래(山來)이고, 호는 심재(心齋)다. 청나라 순치(順治) 7년(1650) 안휘성(安徽省) 흡현(?縣)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관직에 진출해 고관을 지냈으며, 특히 부친은 산동성(山東省) 학도(學道)·감찰어사(監察御史)·시랑(侍郞)·한림관(翰林官)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시쳇말로 그의 집안은 명실상부 명문거족이었다. 이러한 집안 내력의 영향으로 그도 어렸을 때부터 과거와 관련한 팔고문(八股文)을 익혀 15세 때 이미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이 되었다. 그러나 그즈음부터 그의 삶은 “적잖은 시련을 겪어 웅대한 뜻이 점차 마모되고 말았다”라고 말할 만큼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의기소침해졌으며, 더불어 관운도 열리지 않아 진사(進士)는커녕 거인(擧人)도 되지 못한 채 겨우 공생(貢生)의 자격을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관운과는 별개로 이러한 시련은 오히려 그의 문학적 재능을 꽃피워 아름다운 글을 남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30세를 전후로 약 15년에 걸쳐 《심재요복집(心齋聊復集)》·《화영사(花影詞)》·《필가(筆歌)》·《유몽영(幽夢影)》 등을 펴내며, 장죽파(張竹坡)를 위시한 우동(尤?)·오기(吳綺)·공상임(孔尙任) 등과 같이 당시 문명을 떨치던 저명한 문인들과 널리 교유했다. 이외에 《소대총서(昭代叢書)》 150권과 《단기총서(檀幾叢書)》 50권을 비롯해 명·청대 기문(奇文)을 모은 문언 단편 소설집 《우초신지(虞初新志)》 20권 등의 총서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운은 젊은 시절에만 그치지 않았다. 50세가 되던 강희(康熙) 38년(1699), 장조는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관되어 감옥에 갇혔다. 《청사고(?史稿)》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장조 개인의 기록에 따르면 그 사건은 ‘인간적 배신’에 따른 무고였으며, 그때 받은 배신의 충격은 ‘검(劍)’에 호소할 정도로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장조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완전히 붓을 꺾고 말았고, 이후 그의 삶은 더 이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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