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 불어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파리대학교 벵센스 대학 졸업(문학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및 총장 역임.
저서로는 《19세기 佛 詩選》 《불어 언어와 문화》
《프랑스 시 연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생 텍쥐페리 선집》《세기의 야망》
《좁은 문》 《전원 교향곡》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 생 텍쥐페리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 그는 막연하게 앙드레 말로와 몽테를랑과 함께 행동주의 작가로만 알려졌다. 말로는 자기 행동의 무대를 동양에서 찾았으나 그는 파일럿으로서 자기 행동의 무대를 공중에서 찾았다.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용감하고 진지한 인간의 책임감과 성실, 인류 전체에 대한 개인의 공헌, 인간 상호간의 연대의식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알려진 생 텍쥐페리의 모습과는 다른 면을 이 <젊은이의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행동주의 작가일 뿐 아니라 강한 감수성을 가진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인도주의자라는 점이다.
그는 젊은이로서 남불과 서북부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비행하면서 체험한 모든 것을 옛날 학창 시절에 사귄 여자 친구인 리네트에게 자상하게 알려 준다. 그는 편지를 통하여 입센 연극을 옹호하고 필랑델로 연극을 익살스럽게 비평했다. 그는 일찍이 공군에 입대하여 부르제 공항 제33공군 기지에서 근무한 일도 있었고, 제대 후 생활을 위해 입사한 부아롱 튀일러리 화물자동차 회사의 외무 사원을 거쳐, 1926년 정기 항공로의 파일럿으로서 위험한 항공로를 개척하기도 하고 정찰 비행사로서 실전(實戰)에 참가하기도 했다.
생 텍쥐페리는 툴루즈를 거점으로 남불, 에스파냐, 서북부 아프리카 각지를 비행했다. 때로는 위험한 짙은 안개 속을 뚫고 가야 했고 폭풍우 속에서 방황하기도 했다. 어떤 불귀순(不歸順)의 시기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비행기에 총을 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반전쟁(半戰爭) 지역의 상공을 비행하기도 했다. 사방에서 생명을 노리는 모로코 서부 쥐비 곶에서도 근무했다.
비행기를 타거나 다음 비행을 대기하면서도 무수히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전투 끝에 조난당한 동료를 구출하기도 했고 희생된 동료 앞에서 슬퍼하기도 했다. 적을 진압하고 정복하기도 했다. 그후 알제리아 항공 우편기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1929년 가을부터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공 노선을 운항했다.
그는 비행사로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내일을 모르는 비행을 계속하면서 인간적인 고독과 인간애를 뜨겁게 느꼈다. 그는 이러한 고독을 자기 애인에게, 아니 차라리 자기 자신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쓰면서 고독한 심정을 달랜 것이다. 그는 혁혁한 무훈을 세우고 빛나는 공적을 쌓은 15년간의 조종사로서의 심정을 서정시로써 자기 애인에게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