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
1962년 제주생
제주한림공업고등학교 건축과 졸
제주산업정보대학 건축과 졸
현재 올래와정낭건축사사무소 대표
제주 토박이 건축가로서 제주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올래와 정낭이 있는 제주도 곳곳의 현장을 찾아 발품을 판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배움의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지금도 건축일로 바쁜 와중에도 선조들이 남긴 제주 문화에 대해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올래’와 ‘올레’는 같이 쓰인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에 있는 외할머니 댁이다. 거기에는 동서 방향으로 난 길의 북쪽 입구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휘어진 유선형 올래가 있었다. 초등학교 5.6학년 여름방학 때마다 바다고기를 낚아서 외할머니께 드리려고 가보면 올래와 정낭 아래에 마농꽃이 하얗게 핀 것을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올래에는 정낭이 3개 있었는데, 정주석 없이 그냥 올랫담 위에 걸쳐서 정낭을 열고 닫았다.
그로부터 약 20여 년이 흘러 건축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1996년 가을에는 티베트의 동쪽 린즈지역으로 탐험을 하게 되었다. 그 지역은 해발 5,000m가 넘는 지역이 대부분이어서 고산증세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때 오지마을 두 군데서 나무로 된 정낭이 있는 민가를 발견하였다. 제주도에 있는 정낭과 닮은 티베트의 정낭을 본 것을 계기로 올래와 정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직업적으로도 아주 밀접하여 건축설계를 하기 위해 현장 조사하러 갈 때 마다 틈틈이 올래와 정낭에 대하여 조사하였고 사진으로 남겨두기 시작했다.
농어촌. 산촌마을에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로이 주택을 신축할 때 올래도 같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쉬웠다
처음에는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는데 시간이 흘러 올래와 정낭이 갖고 있는 뜻과 기능을 알고 나니 올래가 없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고 속상했다.
어릴 적부터 보았던 원풍경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서 제주의 정체성을 간직한 모든 것들의 소멸해 가기 시작했다. 제주도의 주요 농작물이었던 보리. 고구마. 유채가 거의 사라져버렸고, 신작물인 밀감도 이제는 비닐하우스재배로 바뀌어져 가고 있다.
바다에서 일어났던 원담의 멜 거리기와 온 마을 사람들의 참여하였던 미역허채, 테우를 이용한 자리거리기 등등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어릴 적 지넹이(지네)잡이는 짭짤한 용돈벌이로서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였다. 이처럼 새로운 문명을 소화하지 못하는 문화들은 소멸하여 갔고 지금도 많은 것들이 없어져 가고 있다. 제주 주거문화의 정수인 올래와 정낭도 빠르게 사라진 것이 눈앞의 현실이다.
‘19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제주사람’들을 ‘초(가)집에서 살았던 마지막 세대’, 달리 말하면 ‘아날로그 시대에 살았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초가에서 살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개량된 집이긴 해도 그 속에는 제주주거문화의 원형이 남아 있어서 몸과 마음은 아날로그문화로 성장하였다.
역설적으로 우리 세대는 제주에서 살았던 어느 시대 사람들보다도 행복한 세대다. 아날로그문명에서 디지털문명으로 바뀌는 시간에 살았기 때문이다.
자식 세대부터는 아날로그 문화를 거의 모르고 있고, 손자 세대에서는 책에만 있고 직접체험이 가능한 것은 소수일 것이다.
2007년 9월 8일 토요일. ‘사단법인 제주올레’에 의해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시흥초등학교에서 올레 제1코스 개설식이 열렸다. 많은 분들이 개설식에 참석하였고 개설 기념으로 1코스를 걸었는데 필자도 아들과 함께 참석하여 걸었다. 그 후에 올레길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도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참가하게 되면서 열풍의 중심이 되어 갔다. 그 덕분에 제주도는 관광객이 천만 명을 넘어섰고 더 많은 개발도 이루어졌다. 이날은 올레가 길로 변환된 첫 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올래는 올레길이 되어버리더니 급기야 수많은 따로 또 같은 올레를 양산하기 시작하였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레’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KT의 올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통신회사의 올레뿐만 아니라 대중가요, 음식점, 상점, 코미디영화 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올레가 태어나게 되었다.
올레를 널리 알려준 것은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시대에서 아날로그 문화를 만든 것에 대해서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본질이 잘못 전달되는 것은 아쉽다. ‘올레’에 ‘길’을 붙여서 ‘올레길’로 만들고 올레의 본래 뜻도 왜곡되고 있는 점이다. 포털사이트에서 올레를 검색해보면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좁은 골목 비슷한 길’이라고 나온다.
올레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땐 아쉽다 못해 비분강개했었다. 이젠 올레길이어도 좋고, 올래길이라고 해도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올래의 뜻을 전 국민이 알게 되고 각종사전 및 포털사이트에 정확히 기록되기를 바랄뿐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본디 올래를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올래가 길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당연히 ‘올래는 내 땅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건축법 용어로 설명하면 도로가 아니고 대지(垈地)이다. 필자는 ‘올레길’과 관련된 세미나에서 ‘올래는 길이 아니다’라고 방청석 발언을 해 보았는데 결과적으로는 바보가 된 셈만 겪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올레길’에 익숙한 수많은 대중들에게 ‘길이 아니다’라고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짓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는 조용하거나 말하지 않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이제는 ‘좀쫌’하지 않아도, ‘뚜럼’이라고 놀림을 당하지 않을 만큼 올래와 정낭에 대하여 나름대로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분기탱천. 혼자만이 자신감이긴 하지만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다.
이 글은 많이 미흡하다. 현재 올래와 정낭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쉽게도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다. 디지털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를 지켜왔던 선인들이 만들어 놓은 유산을 어떤 식으로든 보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올래와 정낭에 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많은 지적과 질책이 기다리는 것에 솔직히 겁도 많이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기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어디 숨을 곳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해왔던 것에 대하여 정확히 밝히고 모자란 것은 다시 조사·연구를 통하여 보완하겠다는 약속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질책과 지적이 연구의 동력이 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 땅에 유배 와서 당시 제주사회를 기록으로 남긴 충암 김정 선생을 비롯한 각 시대의 당시 생활을 기록으로 남긴 모든 분들, 직접적으로 올래와 정낭을 알게 해 주신 진성기 선생님과, 김인호 선생님의 명저 『한국 제주 역사. 문화 뿌리학』 은 이 책의 자양분이 되었다.
올래를 답사할 때마다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제주삼춘들은 큰 가르침을 주셨다. 응원해주는 것도 차이가 있다. 삼춘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송당리 올래를 답사할 때 몸을 움직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산간생활문화를 설명해주는 제주삼춘의 가르침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현장을 조사할 때 동행해준 양동우와, 생활민속에 대한 여러 도움을 주신 강홍철 제주민속연구가와 이기정 사장님께 고마운 말을 전한다.
제주어시를 주신 고훈식 선생님과, 마농꽃에 대한 글을 주셔서 이 책이 원론을 빛나게 해주신 김순이 선생님의 고마움은 큰 바다이다.
글을 다듬고 만들어 준 양영자 선생님과 출판사 사장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을 주시는 부모님과, 작년에 큰 병에 걸린 누나를 위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신장을 이식해준 재우와 병을 이겨내 준 재인이는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역전시킨 큰 힘이 되었다. 더불어 아내 김순옥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