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15일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에서 금을 찾던 군인 출신 아버지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두 번의 추방 끝에 아커쑤에 정착한 그녀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그것을 해결할 방편으로 레비야는 15살의 27살의 은행원 압디림과 결혼, 6남매를 두게 된다. 그러나 사랑 없는 13년간의 결혼생활은 불행하게 끝난다.
그녀는 경제력을 키워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우물이 있는 아커쑤 사거리에서 세탁소를 열었다. 이후 양가죽 중개, 목재상을 거쳐 옷감 도매상을 하는 등의 사업적 직감으로 건설 부동산까지 사업을 확장했고, 투자자를 모아 우루무치의 쓰레기장에 대형쇼핑센터를 건축하는 한편 위구르 상인들에게 스스로 임대료를 정하도록 만든다.
‘1000명의 어머니 운동’을 일으켜 각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예술가를 지원하고 보안대를 결성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 신장 인민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중국내 위구르족의 실상을 알리고 권익을 찾기 위해 장쩌민 주석과도 만났다. 그녀의 활동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회의의 중국대표로 참가, 중국 정부의 탄압과 위구르족의 현실을 대변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와중에 감옥에 있던 정치범 시딕 로우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결국 그와 진정한 반려자이자 투쟁동지의 연을 맺는다.
1999년 미국 사절단을 만나러 가던 중 국가기밀유출죄로 체포되어 치욕적인 옥고를 치르다 2005년 3월 병 보석을 받아 남편 시딕이 망명중인 워싱턴으로 옮겨져 현재까지도 중국 공안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독립 투쟁은 세계인의 인정을 받아 2000년 Human Rights Watch상 수상, 2006년 뮌헨에서 열린 세계위구르인대회(WUC)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00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이후 매년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