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와 같은 대학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현재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하며 프리랜서 번역가로 중국어권 도서를 기획 및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원청』, 『오향거리』, 『아Q정전』, 『경화연』, 『삼생삼세 십리도화』, 『봄바람을 기다리며』, 『평원』, 『제7일』, 『사서』, 『물처럼 단단하게』, 『작렬지』,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등이 있다.
담담함과 격렬함이 교묘하게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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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같은 소설이었다.
소리 없이 눈을 녹이며 훈훈하게 다가와 무심하게 겨울을 밀어내는가 하면, 잡힐 듯 말 듯 뺨을 간질이다가 차가운 겨울을 버텨낸 것만 품어주겠다며 냉정하게 방관하는 듯하기도 했다. 담담함과 격렬함이 교묘하게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소설이었다.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희망과 그리움을 떠올렸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마저 자살한 뒤 철저히 혼자가 된 어수룩한 주인공이 삶의 언저리에서 외롭게 서성이다가 결국 폐허가 된 마을로 되돌아왔을 때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사라진 마을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남기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에서는 그의 힘겨운 여정이 무(無)로 돌아가지 않고 긴 그리움이 결실을 맺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을 밭에 묻으면서 곡식으로 자라길 바랄 수 없고, 시신을 화원에 묻으면서 꽃이 피어나길 바랄 수는 없다’는 늘그막 주인공의 겸허한 체념을 접했을 때 먹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진 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에 숨을 불어넣으면서도 결국에는 소멸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담담히 받아들일 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봄바람은 한없이 서글픈 이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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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거페이는 허허벌판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고향마을을 보고 고향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 작품을 구상했노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거시적 흐름이 아니라 미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 보니 챕터 제목이 1장 아버지, 2장 자오더정, 3장 뒷이야기, 4장 춘친 등 인물 위주로 이어지면서 구성도 매우 구체적이다. 이들 개개인의 삶을 하나의 고리로 삼아 오해와 진실, 복선과 반전을 통해 끊임없이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일생을 조망하고 마을의 흥망성쇠를 설명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면 개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보였던 시골마을의 번영과 몰락이 훨씬 더 거대한 층위인 정치적, 경제적 흐름에 따른 필연이었음을 부감하듯 보여준다. 그렇게 자기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낸 사람들에게 담담하면서도 묵직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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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페이는 작품 수가 많지는 않아도 발표하는 작품마다 중국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매우 영향력 있는 작가다. 긴장과 여백의 아름다움이 충만한 그의 작품이 앞으로도 계속 소개되고 널리 읽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