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0월 27일 두만강 강변의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독립군 비밀 단체에 가담해 2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춘사라는 호는 감옥에서 얻었다.
1923년 신극단 예림회에 가입했으며, 23세 때인 1924년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의 연구생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1925년 〈운영전〉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해, 이후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맡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농중조〉로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뛰어올랐다.
1926년 〈아리랑〉의 원작, 각색, 감독, 주연을 맡았다.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당시 〈아리랑〉은 핍박받던 조선의 현실과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한국 영화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그 후 10년간 무성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아리랑〉의 큰 성공을 기반으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특히 192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내놓았다. 1936년 〈아리랑 3편〉을 당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유성영화로 제작했으며, 1937년 병든 몸을 이끌고 만든 〈오몽녀〉는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937년 8월 9일,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과로 등으로 폐결핵이 심해져, 〈오몽녀〉를 유작으로 남긴 채 사망했다. 당시 36세로, 죽기 전까지 그는 〈황무지〉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