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광주 근교 임곡의 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1960년 4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66년엔 살레시오 고교에 입학하여 태권도를 시작하였고, 성당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상원이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71년이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대학에 돌아온 것은 1976년이었다. 1978년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였으나, 입사한 지 6개 월 만에 사표를 던졌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상원은 투사회보를 만들었다. 그는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였다. 5월 26일 외신기자회견을 열어, 윤상원은 진실을 무기로 전두환을 국제 사회에서 고립시켰다. 5월 27일 새벽 2시 계엄군이 진격하자, 윤상원은 고교생들에게 집에 돌아가 역사의 증언자가 되라고 설득하였다. 그는 끝까지 도청을 지켰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항쟁의 심장이자 두뇌였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1982년, 박기순과 영혼의 혼례를 올린 윤상원은 ‘산 자여 따르라’ 외치며 살아남은 자들의 영혼을 역사의 무대 위로 불러내었다. 윤상원과 함께 최후까지 도청을 지킨 전사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