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익필1534(중종29)~1599(선조32).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아버지는 판관(判官) 송사련(宋祀連)이고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나 젊은 나이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할머니가 노비 출신이었던 관계로 금고(禁錮)를 당해 더 이상 과거를 보지 못하고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峰山) 아래로 옮겨가 살았다. 21세 때 이이(李珥), 성혼(成渾), 정철(鄭澈)을 만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으며,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면서 지냈다. 1586년(선조19) 동인들로부터 ‘서인의 모주(謀主)’라는 무함을 받아 노비 신세로 전락하게 되자 성과 이름을 바꾼 채 도망쳐 숨어살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난 뒤 정철의 도움으로 천인 신분에서 벗어났으나, 정철이 실각한 뒤에는 다시 도피 생활을 하다가 자수하여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석방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았으며, 1596년 충청남도 당진(唐津)의 마양촌(馬羊村)에 우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다가 1599년 66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그 뒤 1625년(인조3) 천적(賤籍)을 씻었으며, 1751년(영조27)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송익필은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과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는 붕당의 폐해로 인해, 자신의 경륜을 펴지 못한 채 도망자 신세로 떠돌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송익필은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 분야에 큰 업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큰 성취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송익필은 이이ㆍ성혼과 함께 ‘파주삼현(坡州三賢)’으로, 최경창(崔慶昌)ㆍ백광홍(白光弘)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김시습(金時習)ㆍ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산림삼걸(山林三傑)’로 칭해졌다. 대표작
모두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