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며
이 책은 “정치, 아(我)와 비아(非我)의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나의 정치 개념을 소개한다. 이는 ‘우리의 정치학’을 수립하고자 하는 선후배 동료 학자들의 노력을 잇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정치학’ 수립이 무슨 뜻인지 일반 독자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공부하고 가르치며 배우는 정치학이 ‘수입된’ 정치학으로서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자각에서 비롯한다.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그렇겠지만, 정치학계에서는 상당히 일찍부터 많은 선학들이 우리의 실정에 맞는 정치학, 우리의 시각에 입각한 한국적인 정치학을 수립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적지 않은 성과들이 축적되었으나,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는 서양, 특히 미국에서 발달한 정치학 이론과 개념들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한국정치학회나 한국국제정치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이 우리 글을 읽고 인용하거나 준거로 삼는 것보다 외국의 문헌들에 의존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 초 내가 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우던 시절 학생들은 교수님들이 미국의 정치학만 교육한다고 비판했었다. 전두환이 무력으로 광주항쟁을 짓밟고 국가권력을 장악한 나라에서,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미국의 정치학 이론과 개념들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느 수업 시간에 같은 학과 동기 박병정이 벌떡 일어나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한국은행 자료를 소리 내어 읽을 때, 그것은 단순히 돌출적인 일탈 행위이기보다는 우리 현실에 기반한 정치학을 공부하자는 준엄한 목소리였다. 아둔한 나는 그 자리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여러 이유로 뒤늦게 공부를 하고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뒤 강단에 섰을 때 내가 마주한 나의 모습은 나의 은사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정치학원론」 수업 시간 갑자기 돌아본 나의 모습은 과거 내가 비판했던 선생님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옛날 나의 선생님들이 사용한 것과 대동소이한 교과서를 가지고, 주로 미국의 정치학자들이 개발한 이론과 개념들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막연했지만, 무언가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학생들에게 그러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만 굴뚝같을 뿐이었다. 나는 내 전공분야인 유럽통합의 노사문제라는 작은 공부에 바빠서, 우리 현실에 바탕을 둔 정치학을 수립하자는 생각을 전혀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와 2부는 아비헤투 정치 개념을 소개하고 체계화한 것이고, 3부는 대부분 이론적 논의의 확장이다. 1장과 3장, 6~9장은 기존에 발표한 글들을 수정 보완하거나 책의 편성에 맞춰 재구성한 것이다. 2장과 4장 및 5장은 대부분 새로 집필했다. 9장은 이론적 논의이기보다 경험적 연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3부의 다른 글들과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아비헤투 개념이 분석틀로서 갖는 유용성을 보여주기 위해 함께 출판하는 게 좋겠다는 학생들의 의견을 좇아 이곳에 수록한다. 개별 논문들을 쓸 때마다 아비헤투 정치 개념을 소개해야 했기 때문에 중복되는 부분들이 있다. 중복을 생략하거나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원래 논문 그대로 둔 곳도 있다. 특히 3부에서 개별 논문 자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 다소 중복되더라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했다.
이 책에 나온 생각이나 주장들은 나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내 생각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 아니다. 내 생각을 정립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공부에 있어서도 선생님들과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넘치는 사랑과 응원을 받았다. 이수호, 김동혁, 윤창구, 이근옥, 정효근, 박주기, 김만봉, 김영국, 구영록, 길승흠, 황수익, 이홍구, 김학준, 최명, 이정복, 김홍우, 안청시, 김세균, 장달중, 박찬욱, 강정인, 손호철, 김용호, 백학순, 권무혁, 류석진, 이현휘, 최영진 등 많은 선생님들이 베푼 사랑과 관심도 내가 공부하는 데 큰 힘이 되어왔다. 분리통합연구회 회원들, æting 친구들, 일진삼김, 79동기와 선후배들, 그리고 영남대학교의 청우방과 문지방 및 평화학연구팀과 중앙도서관의 여러 선생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특히 우리 공부 모임에 함께 해준 경산신문 최승호 대표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겨레와 인류를 구하는 공부를 한다는 구실로 일상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데 소홀히 해서 송구하다는 말씀을 안팎의 길동무들께 올린다.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선생님과 학생들께도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철구, 이문조, 김영문, 김태일, 정달현, 정준표 선생님은 내가 학과에 들어올 때부터 아낌없는 성원을 해주셨다. ‘리더십 콜리키움’을 만들어서 당신들의 정치적 성향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인들을 불러도 내색하지 않았고, 학과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는 명목으로 학생들과 산행 및 기행을 다니는 데도 열심히 참여해 주셨다. 무엇보다도 우리 학과 교과목을 전반적으로 개편하는 데에도 싫은 내색 없이 응원해주셨다. 특히 고인이 되신 이문조 선생님은 내가 개설하고 싶은 과목을 마음껏 편성할 수 있도록 당신의 과목을 폐지하면서까지 힘을 실어 주셨다. 늦게나마 선배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학과의 현 동료와 학생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난 10여 년 간 대학원과 학부 수업에서 가끔 이 책의 내용을 같이 논했다. 너무 추상적이고 난해한 주제였겠지만 열심히 참여해 준 친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졸업 후에도 계속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는 친구들과, 함께 서로 배움의 과정에 참여해준 많은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 원고의 정리와 교정을 위해 큰 도움을 준 이예인(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씨에게도 감사한다. 책의 완성을 위해 귀중한 조언을 해주신 박영사의 양수정, 장규식 님께도 감사드린다. 인세 갑부를 만들어 주겠다는 나의 공언에 이번 생을 계속 함께 하고 있는 아내 혜선과 나의 아들로 태어나준 지훈과 지형에게도 사랑과 고마움을 전한다.
후학들을 사랑하고 동등한 학자로 존중해 주신 고 구영록 선생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2023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