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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호1730(영조6)~1796(정조2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는 즉지헌(則止軒),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1761년(영조37)에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시강원ㆍ승정원ㆍ사간원ㆍ홍문관의 여러 벼슬들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 권진응(權震應)이 영조가 당쟁의 폐해를 논한 책인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비판하여 관직에서 해임되자 유언호가 권진응을 구원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당론을 비호한다는 죄목으로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이후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규장각 직제학이 되었고 이어 《명의록(明義錄)》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1787년(정조11)에 우의정에 올랐다. 1788년 12월에 정조가 노론을 비판했던 조덕린(趙德?)의 손자인 조진도(趙進道)를 복과(復科)시키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대신들을 불렀을 때 병을 핑계로 들어오지 않은 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후에 풀려났다. 1795년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802년(순조2)에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춘궁(春宮)의 관원으로서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잘 보호하여 즉위 후 지극한 예우를 받았으며, 의리를 우선해서 조제하는 정조의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저서로 《즉지헌집(則止軒集)》·《연석(燕石)》 등이 전한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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