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읽었던 소설 상록수,
그 주인공처럼 농촌운동가가 되겠다는 지순한 바람을 품었으나 그 길을 비켜나
푸른 제복으로 젊음을 건너왔다. 무릎이 성치 못하다는 판정을 받고도
마라톤에 빠져들었거나 거칠게 산을 오른 것은 내면의 반향이었을까?
우연히든 마음의 바람이었던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만남은 또 이야기를 만들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구불거리는 삶을 살아왔거나
때로는 물길을 거슬러 강단 있게 살아 온 모습들은 너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내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욕심을 가졌다.
여기 너와 내가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간 이들을 만나 잠시라도 동행이 되는 기회를 만들어보기 위해서
저서
무신론자를 위한 변명
차마고도로 떠나는 여인
장터목
안나푸르나 7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누구나 그렇듯 사는 게 아주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집안에서도 문밖을 나가서도. 못난 자가 요행을 바라듯 한참을 기웃거리다 전철역 입구에 포장을 감은 점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주판알을 튕기듯 셈을 놓던 여인은 처음에는 듣기 좋은 말을 이어가더니, 결론처럼 하는 말은 이랬습니다.
“당신의 팔자는 가시나무새 같은 운명이야.”
아일랜드의 전설에 나오는 새의 이야기지요. 둥지를 나와 평생을 편히 쉬지 못하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날라 먹여주기 위해 쉼 없이 날아다닌다는 새, 그러다가 일생에 한 번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고 날카로운 가시나무의 가시에 가슴을 찌르고 죽는다는 새.
그때는 너무 힘들었으니 그 마지막 말이 참 슬프고 우울하게 내 곁에 오래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세상을 떠돌다 제 자리로 돌아오듯 새로운 출발점에 선 듯한, 갑(甲)으로 돌아온 길에서 내 운세를 엿보아주었던 점집 여인의 마지막 그 말이 참 아름답게 다가왔더란 말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아침마다 새벽에 나가 한 시간 반쯤을 걸어 출근을 했고 주말이면 깊은 계곡으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딴 섬으로, 그리고 높고 쓸쓸한 산봉우리를 떠돌았으니까요. 그렇게 떠돌던 길에서 줍거나 대지가 전해준 이야기들,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듯 열두 번째, 책의 제목이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목적지로 가려면 길이 있어야 하듯이 사람에게로 가는 것도 반드시 길이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만이 아닌, 뭔가를 탐색하듯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이었겠는가를 알 수도 있으려나요. 아마 제가 유명인이었다면 낯선 사람에게로 가는 길이었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수월했겠지요. 경우에 따라 대접도 받고 형편에 따라 여비 정도는 챙겨올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지 못했으니 다행스럽게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제 맘대로 쓸 수도 있었을 것 같네요. 열 번째 주인공인 광부의 아내는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해주다가 점점 숨어들어갔으니 저도 좀 자괴스럽기도 했겠지요. 뭐 남의 후미진 곳을 들춰내듯.
아무튼 길 위의 인문학이라면 좀 거창한 듯, 내 곁에 있는 누군가도 길에서 만나 잠시 동행한 누군가도 내가 가진 시선을 거두고 그의 시선에 눈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람을 가져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날까지,
다시 길을 나서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