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의 북부 도시 섀키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다. 바쿠 국립대학교 아제르바이잔 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1943년 시 「어머니와 사진」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해 바쿠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49년 파시즘에 맞서 투쟁하는 민족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 첫 시집 『나의 친구들』을 출간했다.
이후 바쿠 국립대학교 아제르바이잔 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59년 지역 신문 『섀키 패흘래시』에 시 「귈뤼스탄」을 발표하나 소련의 검열이 심하던 시절이었기에 신문은 폐간당하고 와합자대는 학교에서 해고당했다. 그러나 이 시는 발표 며칠 만에 아제르바이잔 전역으로 퍼져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었고, 와합자대의 해고는 사회적 파장이 커서 2년 만에 복직되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지도자이자, 세 차례 국회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던 와합자대는 작품에서 ‘민족의 분단과 통일의 염원, 억압된 현실’을 주로 다뤘으며, 독립 이후에는 인간의 근원적 삶과 본질에 대한 질문을 시로 풀어냈다.
시집뿐만 아니라, 비평서, 학술서, 희곡집 등을 꾸준히 발표했으며, 아제르바이잔 국가상, 소련 정부 국가상 등을 수상했다. 독창적인 사고, 다양성과 창의성으로 아제르바이잔 문단을 풍요롭게 장식한 시인 와합자대는 2009년 바쿠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