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숫자로 박힌 현대사 4·19, 5·16, 12·12, 5·18, 6·29의 현장을 한 금씩 통과하면서 성장하였다. 이긴 자의 손으로 쓴 역사의 기록이란 윤색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비로소, 고려 왕실의 정난정국공신이었던 김부식이 역사를 기록하기에 합당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궁예와 의형제를 맺은 덕분에 남다른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왕건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큰 은혜를 입었던 왕건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패륜과 모반’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가능한 한 궁예를 가혹하게 폄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매사에 실리보다 명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이건만, 유독 궁예의 억울함에 대해서만은 외면했다. 천년이 지났건만, 백성들의 용화세상을 열망했던 궁예를 재평가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오로지, 철원의 대득봉 기슭에서 토박이 어른들에게 궁예의 전설을 들으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던, 내 빚 갚음의 몫으로 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