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이화여대 오수근 교수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예고도 없이 불쑥 연구실을 찾아 왔다. 미국 미시간 법대로 안식년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내가 보면 틀림없이 좋아할 책자를 하나 발견해 복사를 떠 왔다며 내밀었다. 그 제목이 “놀랍게도” - 실제로 정말 놀랐었다 -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100 Years of International Law Exams, University of Michigan)>이었다. 책자 앞에는 전설적인 대가(大家) William Bishop, Jr.(미시간대 1948-77년 재직) 등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고, 가장 오래된 문제는 이름도 처음 듣는 Kirchner 교수란 분이 1896년 6월 출제한 내용이었다. 이를 보는 순간 가슴 속 깊이 가벼운 흥분과 전율을 느꼈다. 와아, 19세기의 문제를 목격할 수 있다니! 작은 책자지만 대학의 역사가 정리되고 축적되는 모습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었다. 명문대학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대학의 학문적 전통이 쌓이는 것 아니겠는가? 반면 우리 대학은 언제 이런 비슷한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 한편을 무거운 돌이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이후 미시간대 국제법 문제집은 마음 깊은 구석에 동면하듯 자리 잡았다. 이 책의 출발점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한 책자를 필자를 위해 일부러 구해다 준 오수근 교수(상사법)에게 감사한다.
미국의 법대들은 - 아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대학은 전부 - 모든 교수의 모든 시험문제를 도서관에 비치해 공개한다. 학생 입장에서 기출문제에 대한 궁금증은 동서고금이 다를 리 없다. 우리 역시 대다수 학생들이 갖은 방법으로 담당교수의 기출문제를 입수하려 한다. 아마 누구는 비교적 손쉽게, 누구는 좀 더 어렵게 구하리라. 그 과정에서 인맥과 개인적 요령도 작용할 것이다. 요새는 학생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공간에 적지 않은 기출문제가 게시되어 있다고 들었다. 과목에 따라 기출문제 획득이 어려운 경우도 물론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강생 일부는 기출문제를 학기 초부터 알았고, 일부는 끝까지 몰랐다면 예기치 않은 불공평이 발생할 수 있다. 시험문제가 무슨 기밀사항도 아니고 결국 다수의 학생이 이를 입수한다면, 학생편의 제공 차원에서 우리도 학교 당국이 매학기 기출문제를 수집해 공개함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일반 학과목 시험문제뿐 아니라, 석박사 과정 입학시험이나 학위논문제출 자격시험도 공개함이 좋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교수 생활을 하면서 같은 국제법 전공 선후배 교수들이 어떻게 출제하는지를 직접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문제가 일반에 공개되면 출제자들은 더 한층 신중할 수밖에 없고, 동료 교수들끼리도 참고가 된다. 출제에 관한 기관 전체의 노하우가 쌓이게 되며, 이를 통해 학교의 역사와 학문적 전통도 축적된다.
필자는 서울대 부임 수년 후부터 서울법대도 매학기 시험문제를 수집해 공개하자고 행정 담당자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누구도 이에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유학시절 자신 또한 그런 편의를 보았을 분들도 기출문제 수집·공개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이상하기조차 했다. 오히려 여러 가지 부작용이 예상된다며 학생들끼리 알아서 구하도록 방임하는 편이 좋다는 분도 있었다.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솔직히 답답했다.
개인적으로 매학기 강의를 마치면 시험 문제지를 파일철에 묶어 정리하고, 컴퓨터 파일로도 보관해 왔다. 가장 큰 목적은 한 두 해 전과 사실상 동일한 문제를 다시 출제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단 필자라도 매 학기 강의 초반 지난 몇 년 간의 그 과목 기출문제와 채점 소감을 수강생들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이번 학기에 반드시 동일한 스타일의 문제가 출제된다고는 미리 장담할 수 없어도, 같은 교수가 같은 과목의 출제를 하는데 갑자기 엄청난 변화가 있기야 하겠냐는 설명과 함께.
채점소감에 대해 잠시 소개한다. 필자는 2004년 1학기부터 정년 퇴임 시까지 서울대학교에서 필기시험을 본 모든 과목에 대해 성적평가 후 채점소감을 홈페이지 수업게시판에 공시했다. 시작은 더 이전부터 했다. 보관된 가장 오랜 기록은 1999년 1학기 채점소감이다. 학교 홈페이지가 제대로 정착되기 전에는 간단한 소감을 학교 게시판에 방문(榜文)으로 붙여보기도 했다. 하여간 2003년도까지는 일정치 않았던 듯싶고, 보관도 되어 있지 않다.
채점소감을 공시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받은 기말성적의 근거가 궁금하겠지만 과거 서울법대의 경우 국제법 수강생이 150명 내외나 되 일일이 개인적 강평을 해주기 어려웠다. 아마 소수의 용감한 학생만이 교수에게 직접 연락해 자신의 성적에 대한 이의나 문의를 했을 것이다. 필자가 이의제기 학생을 만나 답안지를 다시 검토한 후 평가상 실수를 인정하고 성적을 고쳐준 경우는 평생 딱 한번 있었다. 답안지를 찾아 문제점을 지적해 주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설명의 반도 마치기 전 자신의 성적에 승복하고 말문을 돌렸다. 즉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고 온 것이다. 그래도 학생을 만나 답안지를 보여 주며 성적평가의 이유를 설명하려면 최소 30분은 걸리고, 1시간도 금방 지난다. 성적에 민감해 하는 분위기가 형성됨에 따라 찾아오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갔다. 자기 성적에 궁금해 하는 학생을 탓할 수야 없지만, 이의 제기 면담은 피차 괴로운 일이었다. 시간적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수강생에 대한 최소한의 서비스로 채점소감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시하기로 했다. 답안작성의 방향, 중요 논점, 평가시 기준으로 삼은 사항, 많은 학생들이 범한 실수, 좋은 답안을 작성하기 위한 일반적 조언 등을 그야말로 두서없이 나열했다. 체계적인 강평은 못되고, 모범답안의 제시는 더욱 아니었다. 그래도 학생 입장에서는 자기 점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이후부터 성적 이의 방문자가 거의 사라졌다. 채점소감을 작성하는 일이 부담은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몇 배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채점소감은 차년도 수강생에게 기출문제와 함께 제시해 참고하도록 했다. 특히 처음 법학과목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오랫동안 이를 계속하니 그 내용도 상당한 분량이 되었다.
2019학년도를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에서의 24년 6개월의 교수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나름 교수로서 정리할 수 있는 부분은 이번 기회에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가슴 속 한 귀퉁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이 다시 떠올랐다. 나 혼자라도 비슷한 작업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책상 뒤 서가에서 25년 동안 모아온 시험문제철을 꺼내 처음부터 살펴보았다. 하나의 파일철 속에 묶인 시험문제지는 A4 용지 수백장이 되었다. 문제 자체보다 채점소감의 분량이 더 많아 다 합하면 족히 책 한권은 될 듯 했다. 종이 문제지의 내용이 모두 컴퓨터 파일로 보관되어 있는가를 점검하니 예상 외로 1/8 정도의 분량은 컴퓨터 파일이 없었다. 주로 석박사 과정 입시나 자격시험, 과제물 문제 파일들이 보관되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중간·기말 시험문제보다는 관리에 소홀했던 듯싶다. 그래도 종이 문제지가 남아 있는 경우 다시 컴퓨터 파일을 만들 수 있었다. 중간 및 기말 시험문제는 모두 확보되어 있으나, 입시문제나 과제물의 경우 일부 완전 분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막상 서울대 교수생활 25년 간의 시험문제를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 하니 몇 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이를 책자로 다시 내는 작업이 과연 의의가 있는 일인가? 혹시 개인적 호사에 불과하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시험문제 내용에 미숙한 점도 있고, 채점소감에 부끄러운 부분조차 있는데 이를 공개해 스스로 창피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내 실력의 밑천이 너무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흉이나 잡히지 않을까? 책을 내면 독자가 얼마나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이 없지 않았으나 이 모두 필자 개인이나 학교가 거쳐 온 역사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활자화하기로 결심했다. 마치 회고록이란 부끄러움의 기록이듯 말이다. 맡아줄 출판사가 없다면 자비 출판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 몇몇 사람에게 이런 책자를 계획한다는 말을 해 반응을 떠 보았다. 모두들 처음 듣는 종류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니, 자신의 시험문제를 모아 책을 만든다고? 첫 표정은 좀 어리둥절해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책의 출간을 맡아준 박영사 담당자의 첫 반응 역시 비슷했다. 그 때마다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 이야기를 하며, 이 책의 구상은 거기서 시작되었다고 하면 태도가 좀 달라졌다. 해 볼만 한 시도라며 적극적인 격려로 바뀌기도 했다. 다행히 박영사와 출간에 합의할 수 있어서 자비출판은 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제작이 진행되어 교정을 볼 때까지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인가에 관해 알 듯 모를 듯한 불안감이 치솟기도 했다. 하여간 출간의 성사를 위해 노력해 준 박영사 조성호 이사에게 감사한다.
시험문제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매학기 실시한 중간 및 기말시험. 이에는 종종 과제물 문제가 포함되며, 중간시험은 보지 않은 학기도 적지 않았다. 둘째, 석박사 과정 입학시험. 셋째, 석박사 과정 논문제출 자격시험. 채점소감은 물론 중간·기말 시험에 대해서만 첨부되어 있다. 과제물의 경우 다양한 형태의 과제를 부여한 바 있는데, 그 중 사례풀이형 문제가 아닌 경우 본 책자의 성격에 맞지 않아 생략했다. 대학원 석박사 입시와 논문제출 자격시험은 필자가 매년 출제를 담당하지 않았기에 빠진 연도가 많다. 여러 해 강의와 출제를 하다 보니 문제들 중 유사한 경우가 없지 않고, 기말시험 문제를 약간 변형해 수년 후 과제물 문제로 활용하기도 했다. 다소 중복적인 이런 내용 역시 빠짐없이 수록했다. 채점소감은 처음 제시된 내용을 그대로 전재함을 원칙으로 했으나, 당초 거칠게 작성된 표현이 적지 않아 독자의 편의를 위해 약간의 윤문을 한 부분도 있다. 책 구성에서 학사과정 시험을 2004년과 2010년을 기준으로 나눈 이유는 2004년부터 모든 시험에 채점소감을 첨부했다는 개인적인 이유와 2010년부터는 법학전문대학원 국제법 강의가 시작되었다는 제도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편집과정에 박영사 김선민 이사의 노력이 돋보였다.
필기시험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인생 진로에 큰 영향을 주는 입시는 물론이고, 학생시절 매 학기 치루는 학과목 시험 역시 늘 몸과 마음을 힘들게 만든다. 아무리 많이 준비를 해도 시험에 임하는 마음은 늘 불안하다. 필자 역시 30대 중반 박사과정 논문제출 자격시험을 마치니, 이제 내 인생에서 당락이 결정되는 중요시험은 더 이상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적 해방감을 느꼈었다. 시험문제철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준 기록 모음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시험을 피해 살 수 없다. 누가 그랬던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 책자 서문의 맨 마지막 구절과 동일한 단어로 이 글을 마친다.
“Enjoy...”
2020.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