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이과생이라고 믿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아직 개화하지 않은 이과 체질이다’라는 자기최면의 힘으로 카이스트에 진학했지만 전공보다는 과학이 열어 주는 가능성과 인문학적 영감의 교집합인 SF에 빠져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교내전산망에 글쓰기가 취미였다. 학내 영자신문사를 다녔고 카이스트문학상을 받았다.
닷컴 언론사 기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웹 & 앱 서비스 기획자로 정체성을 굳혔다. 짬짬이 친구들과 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던 어느 날, 공부한 걸 직접 실험해 보자는 취지로 협동조합 롤링다이스를 설립했다. 당시 한국 실정에는 SF적 사고실험이었던 ‘협동조합’을 현실에 적용해 보는 경험이었다. 이제는 그곳에서 콘텐츠를 기획하고, 전자책을 제작하고, 팟캐스트를 만들고, 끌리는 일들을 실험하고 도모한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그 제목을 좋아한다. 밉지 않은 허세가 있고, 가볍게 허를 찌르고, 다른 단어를 넣어 패러디하기도 재미있다. ‘유치원’ 부분을 각자의 사정에 맞추어 바꿔 보면 묘하게 다 말이 된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엄마의 무르팍에서 배웠다.’ 오케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할머니의 양산 아래에서 배웠다.’ 오케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버지 차의 뒷좌석에서 배웠다.’ 오케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그만 하자.
지금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SF소설에서 배웠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닐뿐더러, 어머니의 무르팍과 아버지 차의 뒷좌석과 서울시 마포구 어딘가에 있었던 뫄뫄유치원에 대해 실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머리가 제법 굵어지도록 상당히 오랜 시간, 대한민국 출판계는 누군가의 유치원 노릇을 할 정도로 SF소설을 넉넉히 내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든’을 ‘많은’으로 고치는 순간, 이 단어의 너그러움은 전체 문장의 진실성을 아름답게 채워 올린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많은 것은 SF소설에서 배웠다.”
오케이. 흠잡을 데 없는, 참[眞]으로 찬란히 빛나는 한 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