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평생을 정신 착란으로 불우한 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도 넘은 20세기 초에 비로소 현대적 시인으로 부활한 시인 횔덜린. 릴케와 첼란과 같은 현대 시인들은 그를 자신들의 선구자로 여겼고,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를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1770년 독일 남부의 라우펜에서 태어난 횔덜린은 일찍이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가도록 정해졌다. 튀빙엔 신학교 시절에는 헤겔, 셸링 등과 교유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한 그 무렵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지켜보면서 혁명의 이상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급진적 혁명 세력인 자코뱅당의 공포 정치에는 반대했다.
1796년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인 공타르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이때 여주인인 주제테 부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주제테는 이후 횔덜린의 작품에서 ‘디오티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인간과 자연의 더 바랄 것 없는 조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1802년 가정교사를 하려고 갔던 남부 프랑스 보르도로부터 걸어서 귀향한 횔덜린은 그때부터 정신 착란 징후를 보였다. 그 후 1806년 튀빙겐의 아우텐리트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가 이듬해부터 목수인 짐머의 집에 머물며 정신 착란자로 남은 생을 보냈다.
횔덜린은 신이 사라져 버리고 자연과의 조화가 무너진 자신의 시대를 탄식하는 한편으로, 모순과 대립이 지양된 조화로운 전체, 신성(神性)의 부활, 이상, 무한성에 대한 동경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소임이라 보았고, 이에 인간과 자연과 신이 총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그의 사상은 그가 남긴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휘페리온>이 나온 뒤 횔덜린의 문학은 가장 넓은 폭과 풍요로운 만개에 도달했다. 또한 <휘페리온>은 그 서정적 문체와 폭넓은 주제로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조화, 사랑, 자유 등의 고대 그리스 정신을 동경한 만큼 척박한 현실과는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횔덜린은 무려 37년간이나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 1843년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디오티마에 대한 메논의 비탄」, 「빵과 포도주」, 「라인 강」 등의 뛰어난 시를 남겼고,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오이디푸스>를 독일어로 옮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