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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소월

본명:김정식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02년, 평안북도 구성 (처녀자리)

사망:1934년

직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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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한국의 아름다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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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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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진달래꽃> - 2019년 9월  더보기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과 『진달래꽃』에 수록되지 않은 안서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를 기반으로 해서 엮은 책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시인의 유일한 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시혼」을 함께 실었습니다. 후기에 이호림 작가의 「근대시의 시작점 김소월-개인의 발견」을 해설로 첨가했습니다. 김소월 시인하면 모르는 분들이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 그의 시 『진달래꽃』도 마찬가지이고요. 김소월 하면 『진달래꽃』을 연상하게 되고 『진달래꽃』하면 김소월을 연상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창하는 시가 있다면 『진달래꽃』이 그중 가장 앞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소월 시인은 흔히 민족시인이라고 불리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거의 대다수가 알고 애창하는 시인이어서이겠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시의 형식성입니다. 김소월 시인의 시들은 많은 시편에서 우리의 전통적 가락인 민요조나 가사 가요 등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옛 형식 그대로를 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상당한 변용이 있긴 하더라도 십분 연계성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우리들에게 친숙하게 다가들어 옵니다. 전통적 민요가락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내재율에 입각한 자유시가 대세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아직 시적 미성숙성을 보여주는 태도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인의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당대 우리 사회의 미성숙성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합니다. 내재율에 입각한 자유시를 즐길 정도로는 아직 우리 사회가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 더 좁게는 독자가 요구하는 것을 창작하는 것은 시인의 미덕이지 미성숙이 아닐 겁니다. 참고로 시인은 당대 누구보다도 근대와 근대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던 분 가운데의 하나였습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시인을 민족시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살펴집니다. 시인을 흔히들 ‘님’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합니다. 그 ‘님’이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님’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은 한용운입니다. 한용운의 그 ‘님’과 시인의 그 ‘님’을 비교해서 보면 시인의 그 ‘님’은 한용운만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시인의 그 ‘님’을 굳이 민족이라고 본다면, 기존에 시인을 민족시인이라고 하는 데에 어폐가 있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후기에서는 그와는 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책의 후기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쪼록 이 책이 김소월 시인을 이해하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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