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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한국학자료원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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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묘법연화경 - 전2권>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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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 전후사 - 전3권> - 2022년 8월  더보기

130년간의 생생한 현장기록 신문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사건이 일어난 그때의 생생한 기록이다. 과거사를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1차 자료가 신문이다. 근대이후 100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파란만장한 대형 사건들로 짜여져 있다. 그때마다 중요 신문들은 ‘호외(號外)’로 찍어 속보速報)로 전했다. 호외의 역사는 격동의 근현대사 색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일간신문은 하루 한번 발행 호수(號數)를 매긴다. 그렇게 매긴 호수가 신문의 일련번호이고 발행 역사이기도 하다. 정규로 발행하는 신문과 달리 긴급 사건이 발생할 경우 정규발행을 기다리기 전 속보용 신문을 비정규적으로 제작해서 배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호외(號外)다. 호외는 일련번호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호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나라는 일본이다. -명치5년(1872년) 7월 일본의 《태정관일지》 에 학문 보급을 논한 〈태정관포고문〉에서 난(關) 외에 ‘호외(號外)’라고 기록한 것이 시원이다. 일본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신문은 《조야신문(朝野新聞)》 으로, 1876년10월 29일 구마모토(熊本)에서 발생한 ‘신풍련(神風連)사건을 속보로 전하면서였다. 처음에는 속보를 별보(別報) 또는 별호(別號), 별지(別紙)라고 불렀다. 본지와는 별도로 배달한다고 해서 ‘별배달 (別配達)’이라고도 불렀다. 세계 최초의 호외는 미국최초의 신문인 《보스턴 뉴스레터》 이다. 당시 근해를 누비면서 사람들의 재물을 뺏고 살인까지 저질렀던 해적 6인을 처형한 사실을 호외로 알렸다. 일본에서는 1868년 5월 16일자 《중외신문(中外新聞)》 이 《별단중외신문(別段中外新聞)》 이란이름으로 호수 없이 발행했다. 당시의 우에노(上野)에서 ‘창의대(彰義隊)사건'을 호외로 발행했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호외이다. '당시에는 네덜란드어의 'Extra’를 한자 투로 번역하여별단(別段)’ 이라고 했다. 현재도 영자신문에서는 호외를 ‘Extra’로 표기한다. 한국에서 첫 호외는 언제, 어떤 신문에서 나왔을까. 1894년(갑오년) 7월 23일자 《조선신보(朝鮮申報)》 룰 한국 최초의 호외를 꼽을수 있다. 당시 이 신문은 인천에서 발행되었는데 당일 오전 일본군의 경복궁을 급습한 사건을 ‘호외’라는 이름으로 발행했다. 이 신문은 경제지 성격의 신문이었으나 사건이 크다고 하여 호외로 발행한 것 같다. 이 신문은 일본인이 발행한 신문이었다.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호외는 서재필이 국고 5천원을 보조받아 1896년 4월 7일 에 창간한 《독립신문(獨立新聞)》 이다. 2월 19일 미국 군함 메인호(號)가 쿠바 하바나항(港)에서 폭침된 사실을 호외로 보도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2월 22일자 영문판에 다시 게재하기도했다. 신문 호외 130년을 축약한 《호외(號外)》 는 1868년 일본에서 호외가 발행된 이래 1995년까지 130년동안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전 12책으로 역은 호외의 제1권은 1868년부터 1912년까지 명치사(明治史)를 다루었다. 제2권은 대정사(大正史 1912∼1926), 제3권 소화사1(紹和史1 1926∼1935), 제4권 소화사2(瓚和史2 1936∼1945), 제5권 전후사(戰後史 l945∼1995)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모두 12책에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중요 내용을 보면 제1권에는 청일(淸日)전쟁의 발발, 영일(英日)동맹 체결, 러일강화조약 체결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담겨 있다. 제2권에서는 우리 교민들을 학살했던 관동대지진을다루었고, 제3권에서는 런던 군축회의, “만주사변 발발 일본의 유엔탈퇴를 실었다. 또 제4권에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삼국동맹,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등 중요사건울 기록했다. 호외는 근현대사를 다루었으므로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의 시각으로 본 역사의식이지만 우리가 갖지 못한 수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학술적 정보로서의 가치가 큰 편이다. 일제가조선을 강제 병합하는 과정과 청일전쟁, 러일전쟁, 일제의 중국대륙침략 남경대학살 동남아시아 침략에서부터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수 많은 사진과 함께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도록 했다. 남경대학살에 관한 당시의 호외보도를 간추려 보았다. 중국에서는 남경대도살(南京大屠殺) 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이라고 한다.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그 때문에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 되었다..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다. 1939년 4월에는 1644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는 등 일제의 온갖 만행이 아루어지기도 했다. 난징 전투 당시 중국군 지휘관은 탕성즈(唐生智) 장군이었다. 그는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 겠다“고 선언했다. 삼면에서 쳐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서 중국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충은 도시를 빠져 나갔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당성즈는 양쯔강을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하지 못한채 남아있던 50~60만의 시민들과 군인들이 일본군에게 처참한 학살당한 것이다. 6주간에 걸쳐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중국군포로뿐만 아니라 젊은남자들을 닥치는대로 끌고가 성의 곽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했다. 그 뿐만 아니라 수천에서 수만 명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을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찌르고 목을 베는 희생물로 삼았다. 여기서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구덩이에 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이번에는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된 사건을 찾아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미국은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 했다. 8월6일 히로시마에 한개 8월9일 나가사키에 나머지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앞서 미국은 영국, 중화민국과 함께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강요하였다. 일본이 응하지 않자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명령으로 원자폭탄 ‘리틀보이(Li仕le boy)를 히로시마에 ’팻맨(Fat man)’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6일후인 8월15일 일본제국의 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2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이날 조선도 광복을 맞았으며 한편 독일은 이미 5월 7일 유럽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두 개의 원폭투하로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도 않고, 들여오지도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다. 《호외》 는 일본군의 진주만공격을 받은 미국의 반격과 일본왕의 항복 등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호외》 는 대형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현장에서 그려낸 기사와 사진이므로 그 어떤 자료보다 사실성이 있다. 역사는 대부분 지난 일을 후세에 기록한 것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문이라 당시의 현장기록이다. 호외 또한 작은 신문으로써 큰 사건만을 간추려 보도했으므로 내용면에서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호외》 에 담긴 내용은 놀람도록 방대하다. 《호의》를 통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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