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 자는 금초琴招, 호는 청전靑田이다.
다산 정약용이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1806년 가을부터 1808년 초봄까지 이청의 집에 거처했다. 십대 시절에 정약용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차차 그의 저술을 도왔는데, 특히 경전과 역사 방면의 문헌 대조와 비교 및 검토에 능했다. 하지만 70세까지 과거에 응시해도 번번이 낙방하고 말았다. 정약용이 《여유당전서》를 저술할 때 중요한 조력자였고, 정약전의 초고인 《자산어보》를 수습하고 문헌 고증 및 일부 어종을 추가한 공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