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는 법치로 세상을 다스릴 것을 주장한 전국시기 한(韓)나라의 사상가다. 왕실 공자 출신으로, 말을 더듬거렸다고 한다. 진(秦)나라의 승상 이사(李斯)와 함께 순황(荀况), 즉 순자(荀子)에게서 학문을 배운 적도 있었다. 성악설(性惡說)에 근거한 그의 주장은 스승 순자의 영향을 받은 바 컸다.
한비의 조국 한나라는 국력이 약해 수시로 진(秦)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그는 군주에게 누차 부국강병책을 올리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난언(難言)>과 <화씨(和氏)> 등을 써서 한나라 군주에게 법과 통치술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음을 설파했다. 당계공(堂谿公)이 한비에게, 강력한 법치를 펼친다면 몸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지혜를 숨기고 인의를 행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한비는 법치만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고 그의 말을 거절했다. 한비는 한나라 군주가 법치를 행하지 않고, 농사짓고 전쟁하는 사람을 격려하지 않고, 허황된 말과 유가의 말을 믿는 것에 분개했다. 이런 세태를 보고 <고분(孤憤)>·<세난(說難)>·<오두(五蠹)> 등 ≪한비자≫를 대표하는 글을 썼다.
한비는 한나라 군주 안(安)이 즉위하자 중용되었다. 안은 즉위한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한비와 진나라를 물리칠 방안을 생각했다. 안 5년(기원전 234)에 훗날의 진(秦)나라 군주가 되는 영정(嬴政)은 한비가 쓴 <고분>과 <오두> 등을 보고 “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교류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진나라는 한비를 얻기 위해 한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의 자격으로 진나라로 보냈다. 한비는 진나라에 도착해 진나라 군주에게 한나라를 쳐서는 안 되는 이유를 담은 글을 올렸으나 동문수학한 이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여기에 한비가 진나라 군주 면전에서 총신 요가(姚賈)를 비판했다. 이사와 요가는 합심해 한비를 한나라의 간첩이라고 모함했다. 진나라 군주는 이 말을 믿고 한비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이사는 한비에게 독약을 보내 한비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한비는 진나라 군주에게 자신의 결백을 알리고 싶었으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진나라 군주는 후회하며 한비를 사면하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한비는 이미 옥중에서 숨을 거둔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