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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기(齊己)제기(齊己)는 당대(唐代) 말 864년경에 현재의 후난(湖南) 창사(長沙)에서 태어나 오대(五代) 후량(後梁)에서 938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출가 전의 이름은 호득생(胡得生)이었으며, 스스로 지은 호는 형악사문(衡岳沙門)이다. 어려서 고아가 된 이후 인근 절에서 소를 보는 목동 일을 하다가 노스님을 따라 대위산(大潙山) 동경사(同慶寺)에서 출가했다. 출가한 이후에 장사(長沙)의 도림사(道林寺)로 옮겨 머물렀으며, 또한 당이 멸망한 이후에는 남방을 주유하다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머물렀다. 만년에는 형주(荊州)의 용흥사(龍興寺)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주했다. 제기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주로 ≪당재자전(唐才子傳)≫·≪오대사보(五代史補)≫·≪십국춘추(十國春秋)≫·≪송고승전(宋高僧傳)≫·≪전당시(全唐詩)≫ 등에 전하고 있다. ≪당재자전≫과 ≪송고승전≫에는 그의 출생과 더불어 그의 성격이 자유분방하며 청담한 기풍을 가졌고, 금을 잘 타며 술을 즐겼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풍은 바로 그의 시가 창작에 잘 녹아들어 있다. 또한 ≪오대사보≫에는 제기와 관련한 ‘한 글자 스승(一字師)’이라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에 정곡(鄭谷)은 유명한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는데, 제기는 자신의 시 <이른 매화(早梅)>를 가지고 정곡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정곡이 제기의 시 구절 중에서 ‘앞마을에 눈이 가득 내렸지만,/ 어젯밤에 많은 가지에 꽃이 피어났네’보다는 ‘한 가지에 꽃이 피어났네’라고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자, 이에 제기는 정곡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고 한다. 이는 제기의 시가 창작에 대한 애착을 보여 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는 당시에 ‘시낭(詩囊)’으로 불렸다고 한다. 제기의 가장 기본적인 시가 풍격은 명대(明代) 호진형(胡震亨)의 시가 평론서 ≪당음계첨(唐音癸籤)≫에 전하는 “제기의 시가는 맑고 윤기가 있으며 평담하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후에 제기는 자신의 시 약 800여 수를 엮어 ≪백련집(白蓮集)≫ 10권을 편찬했으며 벗인 손광헌(孫光憲)이 서문을 썼다. 그의 저술로는 시가 이론서인 ≪풍소지격(風騷旨格)≫이 전하는데, 여기에는 시가 창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고 있다. ![]() ![]()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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