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라는 것
바로 왔어도 되는 길을 돌아서 왔다. 왜 좀 더 일찍 오지 않았을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늦게라도 이쪽으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두려워 내게 묻는다. 작가라는 그 말을 내가 들어도 되는 걸까?
지나온 길지 않은 삶은 결핍에서 오는 상처와 오류가 많았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정된 환경과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던 길과 부르지 않았지만 제 발로 찾아든 불행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오기와 글쓰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버틴다고밖에 달리 다른 말을 쓸 수 없었던 때에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와 책읽기였다. 내 글쓰기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작고, 약한 것들의 슬픔의 대하여, 소외된 것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을 쓰고 싶었다. 강하고 잘난 것들이 군림하는 세상에서 약하고 못난 것들의 가치에 대하여, 가지지 못한 것들의 서러움에 대하여, 여려서 더없이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서술하고 싶었다. 그 편에 서서 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데, 아름답게 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길로 들어와 보니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되는 얘기와 해선 안 되는 얘기가 있었다. 드러내도 되는 이야기와 들추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상처는 훈장이 될 수 없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가슴에 남겨 두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독자로 마음 편하게 30여 년 책을 읽다가 맞은편 자리에 섰다. 독자의 눈이 두렵다. 내어 놓아도 좋을까를 몇 번이고 생각했다. 책값이 아깝지 않은 책이어야 하는 부담이 발끝에 걸린다.
그럼에도 책을 낸다. 내 인생 처음이다. 비릿한 날내와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오는 처음은 언제나 두근거린다. 눈 내린 길에 내딛는 발자국 소리 같은, 주민등록증 받는 열여덟의 낯선 책임감 같은 처음. 그 처음이 좋다. 지금 내게 처음이 왔다.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