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잘한 꽃에서 시작하는 포도송이
흙 마당이 있는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난 걸 처음 안 것이 포도나무 아래에서였다고 한다. 학교 다녀와 포도나무 줄기에 걸터앉아 있는데,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단다. 언니 오빠들이 학교 간 사이 내가 태어난 것이다.
뒤뜰에 있던 늙은 포도나무는 나의 놀이터였다. 니은 자로 휜 뿌리 쪽 굵은 원줄기는 의자가 되어 주었다. 거기 앉아 상상하는 시간이 좋았다.
포도나무는 때로 무섭기도 했다. 언제 마주칠지 모를 큰 벌레 때문이었다. 눈동자 같은 점이 줄줄이 박힌 초록과 갈색의 손가락만 한 벌레. 그 물컹함은 여전히 서늘하다.
좁쌀처럼 자잘한 포도꽃은 여름이면 또랑또랑한 포도알로 자라 송이를 이루었다. 연자주색에서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다 익었겠거니 따 보면, 안쪽엔 덜 익어 푸른 알과 덜 자란 알도 있었다.
첫 동시집을 내면서 어린 시절의 포도나무가 떠올랐다. 늘 마음의 의자가 되어 주시는 부모님, 여전히 막내를 감싼 덩굴손을 거두지 않는 언니 오빠, 그리고 덜 자란 포도알 같은 나.
다디달게 익혀 따야 하는데 서툰 농부의 솜씨로 설익은 포도를 내놓는 것 같다.
하지만 선들바람 부는 가을, 뒤늦게 발견의 기쁨을 주던 이파리 사이 한두 알의 포도를 떠올리며 용기를 내본다. 격려와 쓴소리 모두 열매를 키우는 볕이요 좋은 거름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