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에서 태어나(1934년) 전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제8회, 1957년)에 합격, 검사(법무부, 서울지검 등에서)로 일하다가 변호사로 전신하였다(1965년). 역대 독재정권 아래서 탄압받는 양심수와 시국사범의 변호와 민주화·인권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어떤 조사> 필화사건(1975년)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1980년)으로 두 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변호사 자격 박탈 8년 만에 복권, 변호사 활동을 재개하여(1983년) 필화사건을 포함한 시국사건의 변호를 계속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전무이사, 방송위원회 위원,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감사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대통령 통일고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서울특별시 시정고문단 대표 등의 직분을 맡아 일했으며 중앙대, 서강대, 연세대, 가천대 등에서 저작권법을 강의하고, 전북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법과 인간의 항변》 《위장시대의 증언》 《허상과 진실》 《저작권의 국제적 보호와 출판》 《저작권의 법제와 실무》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실록》(전7권) 《분단시대의 법정》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한일 현대사와 평화·민주주의를 생각한다》(日)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등 47권이 있다.
인제인성대상, 정일형·이태형 자유민주상, 중앙대 언론문화상, 한국인권연구소(재미) 인권상, 임창순 학술상, 단재상, 201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2022년 4월 20일 8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드셨다.
◎ 법(法)과 서정(抒情)의 사이
법은 까다롭고 골치 아프고 무섭다는 인식에서 대강은 벗어나기 어렵다. 알고 보면 법이라는 것도 상식과 윤리와 관습에 뿌리를 두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든가 집단생활의 규범 따위를 정의로운 안목에서 판단하는 잣대라고 아무리 강조한들 ‘에비 에비’의 대상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 신세를 지는 것도 싫고, 하물며 법망 속에 갇히는 일은 질색이기 때문에, 평생 동안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일단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는 이들의 일반적인 관념일 터이다.
물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세상’에서 사노라면 법을 친근한 벗으로 삼지 말라는 ‘법’ 또한 없겠으나, 그것도 ‘글쎄올시다’의 수준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래저래 법은 불가근불가원의 존재면서, 전체적으로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그 언저리마저 피해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내력에서겠지만, 법은 또 항상 차고 근엄한 표정을 짓게 마련이어서 근접을 불허하는 속성도 있다.
한승헌은 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생활인의 거리를, 성큼 좁혀준 대표적인 사람의 하나다. 그의 직업 자체가 변호사인 까닭만은 아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할진대, 그리고 다분히 경강부회의 느낌은 있되, 그는 생김새부터 법을 배경에 두르고 있는 그쪽 직업인들의 위세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셈이다. 꺼무스름한 얼굴 위의 두 눈은 노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입에서는 만나는 사람의 가슴을 더불어 열어주는 푸근한 해학이 뛰어난 유머 감각과 함께 순발력 있게 튀어나와 친화력(親和力)을 보탠다. 눈앞의 누군가가 성에 안 차는 사람일 때, 농담에 가시를 싸서 던지는 촌철살인의 멋 또한 그의 것이다.
한승헌의 한승헌다움을 바로 이 점에서 발견한다. 인권변호사이면서 시인인 한승헌, 시인이면서 수필가인 한승헌은, 법리(法理)를 매섭게 따지되 그 속에 모듬살이의 순수한 서정성을 담기 때문에 그의 변론은 마침내 인간적이다. 남들이 갖추기 힘든 조건을 체질적으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무주 구천동이 그리 멀지 않은 전라도 첩첩산중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75년에서 80년 봄 사이에 두 번 옥살이를 한 그는 필경 법이 무엇을 위해 있어야 하는가를 양날의 논리로 더욱 키웠을까. 한승헌의 부지런한 저작 활동을 통해 보면 그런 흔적이 두드러진다.
흔히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직업의 ‘결백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짙다. 판사는 판사 일에만 몰두하고 변호사는 변호사 업무 이외의 일에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다. 따라서 과학자가 소설가를 겸한다면 그 사회에서는 ‘돌연변이’로 치기 쉽다. 하지만 그와 같은 추세를 굳이 예외시할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세계적 철학자일 수도 있으며 문명비평가 노릇을 한대서 이상할 것이 없다.
1990년 3월 서울서 열린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존 세계대회’(JPIC)에 참석차 내한했던 서독의 물리학자며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박사도 그런 사람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일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는 후자의 경우다. 문제는 그 분야에서 거둔 성과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다양성이 구가되는 시세(時勢)와도 걸맞지 않다.
더구나 종사하고 있는 일이 글을 통한 표현과 연관됨으로써 양자를 자기 안에서 승화시키는 성질을 띠었다면 한층 다행스럽다. 취미나 여기(餘技) 또는 아마추어의 도락쯤으로 여긴다면 모를까, 낱낱의 분야에서 뚜렷한 존재로 서 있을 때, 그의 빛나는 예지를 부러워했으면 했지 탓할 건 아닌 것이다. 남다른 재주를 지녔으면서 스스로를 절제하기에 힘쓰고 ‘우매한 바보’의 위대성까지 꿰뚫는 안목을 지녔으면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