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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최현배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894년, 경상남도 울산군 하산면

사망: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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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외솔 최현배의 문학.논술.논문 전집 3>

최현배

외솔 최현배 선생은 1894년 갑오개혁과 농민 혁명이 있던 해에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1899년(5세)부터 8년 동안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다가, 1910년(16세)에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5년 만에 졸업을 한다. 이 시기에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과 말본을 배웠는데, 이때의 경험이 최현배 선생의 앞길에 매우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했다.

1915년(21세)에 일본 히로시마사범학교 문과 제일부에 입학하고, 1919년(25세)에 졸업을 하면서 수신, 교육, 일어, 한문, 번제경제 등의 교원증을 받았다. 이듬해에 경남 사립 동래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2년(18세)에 일본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입학해 1925년(31세) 철학 개론과 심리 및 논증의 고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받으면서 졸업을 했다. 바로 그해부터 논설적 에세이집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구상하고, 1926년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서 연재해 세간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26년(32세)에 연희전문학교 교수에 부임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30년(36세)에는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출간했는데, 출간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교양 도서로 애독했는데, 심지어는 일본 사람들도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처럼 여겼다고 한다.

1938년(44세)에 ‘흥업 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연희전문대학에서 강제 사직을 당했다. 최현배 선생은 흥원 경찰서를 거쳐 함흥 감옥으로 이감되어 한 해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영어 생활을 했다. 그 가운데서도 ≪글자의 혁명≫을 집필해 한글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38년(44세)에는 ≪한글갈≫을 출간하면서 이후 한글 연구에 몰두했다. 1941년(47세)에 연희전문학교에 복직했으나, 이듬해에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함흥 감옥에서 옥중 생활을 시작해 광복 이후에 풀려났다.

1945년(51세) 광복이 되자, 조선 어학회 상무이사를 맡고 국어 교육에 힘을 썼다. 같은 해에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을 하면서 당시 불모지와도 같았던 국어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열성을 다했다. 만 3년간의 편수국장을 마치고 ‘한글 전용 촉진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글 전용을 국회에서 법령으로 제정하도록 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또한 1946년(52세)에는 ‘한글 가로글씨 연구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말본 강사를 했다.

1949년(55세)에는 ‘조선 어학회’를 ‘한글 학회’로 개칭해 이사장에 취임했다. 1951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취임해 전쟁 와중에 국어 교육의 기본을 바로잡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54년(60세)에는 연희대학교 교수로 다시 부임하면서 학장직을 맡고, 이듬해에는 부총장의 보직을 수행하면서 같은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57년(73세)에는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를 창립해 부회장에 취임해 한글 정신의 근간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각종 활동을 했다. 1962년(68세)에는 ‘한국 기계화 연구소’를 신설하고 소장직을 맡았으며, 같은 해에 연세대학교 이사로 취임해 활동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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