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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노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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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철로 위에 선 근대 지식인>

노상직

자는 치팔致八이고, 호는 소눌·눌인訥人·자암병수紫巖病?이다. 1855년 11월 21일 김해金海 금곡金谷에서 생부 노필연盧?淵과 생모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태어나 노호연盧?淵에게 입적되었다. 그는 생부의 상喪과 스승의 상을 당한 이후 과거공부를 접고 오로지 독서와 강학에 전념했다. 그리고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을 거치면서 외세의 영향으로 정국이 극도로 어지러워지자, 1894년 거주지를 밀양으로 옮겼다. 그 후 1895년에는 밀양의 금곡에 금산서당錦山書堂을 건립하여 후학양성에 힘썼다. 1896년에는 밀양의 노곡에 자암초려紫巖草廬를 짓고 강학을 확대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다.
소눌은 그의 형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이 망명을 떠난 지 한 달 뒤에 온가족을 모두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안동현으로 갔다. 그곳에서 소눌은 형에게 입적시켰던 아들 노식용盧寔容을 병으로 잃었다. 이후 소눌은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라는 형의 강한 권고를 받아들여, 1913년 1월에 사판을 모시고 환국했다. 그 후에도 그는 형을 만나러 여섯 차례나 철로를 따라 서간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망명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소눌은 이듬해인 1914년부터 자암서당紫巖書堂을 건립하고 강학을 재개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19년 독립만세운동 때 전국 유림에서 면우?宇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했다. 이때 소눌은 김해 대표로 제자들과 함께 서명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자암서당을 중수하여 강학에 더욱 힘쓰다가, 1931년 1월 22일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선 뒤, 소눌은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에 서훈되었으며, 2009년 6월 23일 김해 한림면 금곡리에서 국립대전현충원 애지제4-51 묘역으로 이장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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