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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고시홍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 대한민국 제주

최근작
2024년 7월 <침묵의 비망록>

고시홍

제주도 출생. 1983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대통령의 손수건], [계명의 도시], [물음표의 사슬], [그래도 그게 아니다], 그 외 공동편저 [고려사 탐라록]이 있음. 제주4·3희생자 추가진상조사자문위원, 제주4·3 70년사 [어둠에서 빛으로] 편집위원장 등을 지냄. 탐라문화상 수상.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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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물음표의 사슬> - 2015년 6월  더보기

이제 그들 곁을 떠나야겠다 갓 등단했을 무렵이었다. 문단의 대선배인 소설가 J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했다. “작은 재미 때문에 큰 재미를 놓칠 수 있어요. 그리고 사소한 일로 분노하고 괴로워하며 방황하지 말아요. 정작 분노해야 할 일에는 침묵하거나 뒷짐을 진 자세로 살아가잖아요.” 바둑에 빗댄다면, 고수와 하수의 차이를 말하는 암유였다. 반상의 돌부처 이창호가 말하는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로 환치할 수 있겠다. 하수는 지키고 버려야 할 요석과 폐석을 가리는 분별력이 약하다. 소탐대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상대의 손 따라 우왕좌왕하다가 미생의 늪에서 허둥대기 일쑤다. ‘작은 재미, 큰 재미’는 굽이 잦은 비탈길의 반사경, 위험 경고판이었다가 때로는 부끄러운 자화상의 실루엣을 담은 전신거울이 되었다. 하지만 크고 작은 것의 무게와 길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사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먹고 싸고, 자고 노는 일까지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닌데. 시나브로 소설 쓰기는 일상에 파묻혔다. 그게 자괴감과 분노, 갈등, 방황의 물레방아가 됐다. 아내의 질타와 냉소도 함께 돌아갔다. “뭣뭣 때문에 글을 못 쓴단 핑계 대지 마세요. 자기 탓이지…….” 전업 작가와 신문사 논설위원으로의 이직을 시도하다가 그만뒀다. 고뇌하는 시늉으로 끝냈다. 두 번째 소설집 이후에는 주로 4.3 탐색과 제주 토박이 어른들의 삶을 채록하는 데 미쳐 살았다. 그렇게 흔들리며 이끌어 온 만 서른여덟 해 다섯 달의 교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큰 재미’에 미쳐 사는 삶이 시작됐다. 그 징표로『물음표의 사슬』을 엮는다. 힘의 논리로 위장한 폭력의 화신으로 변신해 봤다. 무차별적이고 절대적인 아레스 같은. 카메라 앵글 같은 시선으로 폭력의 사슬에 묶인 군상들을 포착했다. 그런 작품들만 모았다. 특히 ‘4.3’은 내 운명의 탯줄이다. 소설 쓰기의 원천이다. 하여 스스로 ‘4.3’의 족쇄를 채웠다. 오랜 세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나는 음력으로는 1948년 12월, 양력으로는 1949년 1월생이다. 정확한 생일은 모른다. 호적에는 잘못 등재되었다. 1929년생인 아버지는 1947년 겨울인지 이듬해 이른봄에 결혼했다. 부모님과 내 나이는 열아홉, 스무 살 차이밖에 안 된다. 아버지는 1949년 3월에 입대했다. 할머니는, 생전에 ‘밤이 되민 왓샤왓샤 허는 바람에 모슬포 군대에 자원입대했다.’고 중언부언했다. 모슬포에서 훈련을 받고, 제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에 배속됐다. 제2연대는 ‘여순 사건’을 진압했던 부대였다. 〈국도신문〉 1949년 4월 21일자에 따르면, ‘함(병선) 중령이 지휘하는 국군의 정예 2연대의 제주 주둔’은 ‘종래의 미온.소극 작전을 떠나 적의 최후의 한 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 고립화 작전을 실시’하기 위함이었다. 무장대 공세의 맞불 작전으로 1949년 3월 초까지 강경진압작전이 지속되었다. 제2연대는 1949년 5월 15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제주에서 인천으로 철수했다. 아버지는 이듬해 6.25 전쟁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그리고 8개월 남짓 토벌작전을 전개한 제2연대는, ‘4.3’ 진압 앨범『제2연대 제주도주둔기』를 남겼다. ‘高千文’이란 육필 서명이 된『제2연대 제주도주둔기』가 한 권 있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며, 내게 남긴 유산이었다. 1990년대 ‘4.3’ 진상규명 열풍에 휩쓸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과정에 분실됐다. 선친과 함께 행불됐다. 제주섬은 전쟁터가 된 적이 없다. 더구나 해방공간 무렵에는. 그런데 2만 5천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되는 ‘4.3’ 인명 피해를 냈다. 1948년 10월에서 1949년 2월에 가장 많은 양민 학살이 있었다. 누구 말마따나 ‘국가는 폭력’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양민 학살의 주역인 제2연대 병사였다. 당연히 진압 작전에 동원되었을 터였다. 이게 ‘4.3’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동구역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유다. 어머니는 다섯 살 무렵 내 곁을 떠났다. 평생 울화병에 시달렸다. 내 주변을 맴도는 그림자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족(纏足) 같은 존재였다. 힘겨운 세월이었다.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접하던 순간은 고목 등걸 같은 체증이 확 가시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어떤 환희랄까, 족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해방감 같은. ‘작가의 말’을 끝맺는 지금도 ‘그때 그 순간’과 비슷한 심경이다. 소설집『물음표의 사슬』을 아버지와 어머니, 폭력의 단두대에서 원혼(冤魂)이 된 분들을 위한 위령비로 삼고 싶다. 이제 그들 곁을 떠나려 한다. 살아 있는 자들을 만나기 위해. 갈 길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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