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 2월 11일,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에서 아버지 정연철鄭然喆과 어머니 장우련張又蓮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57 대구 삼덕국민학교를 졸업했으나, 영천군 자천국민학교, 금호국민학교, 신영국민학교, 영천국민학교, 금천국민학교 등을 두루 전학 다닌 후였다.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라 자주 전근을 다니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지서장이 된 것은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6?25가 발발하기 전인데, 영주군 부석지서에서였다. 출몰하는 공비들의 기습에 대항하기 위해 지서는 하늘을 찌르는 높이의 토담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부석의 추억은 부석사와 함께 나에게 영원한 신비로움으로 남아 있다.
1963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 건물이 옛 대구사범이라 붉은 벽돌 건물이 담쟁이덩굴로 덮여 있어 고색창연한 운치가 있었다. 고교를 졸업했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 봉화로 내려갔다. 사춘기의 ‘허무’병에 빠진데다가,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대 불어과에 입학하여 잠시 다녔으나, 학교 분위기 등이 맞지 않는데다 등록금이 없어 낙향하였다. 중?고교 시절 전혀 문학도가 아니었던 나는 낙향하여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카뮈와 동인의 소설에서 어떤 충격을 느끼고 막연하나마 작가로서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64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입학. 불문과 입학생 20명 중 남학생은 7명이었고, 시골 출신은 나밖에 없었다. 고교 때 불어를 배우지 않고 독학으로 불문과에 들어온 나는 불어 실력에서 고전하였다.
1969 서울대 졸업. 학교를 완전히 고학으로 다녔다. 가정교사로 떠돌며 촌놈이 서울을 배워 갔으나, 견디질 못하고 두 학기나 휴학하였다. 휴학기간 중 봉화로 돌아가, 세계명작들과 한국문학전집을 독파하였다. 1966년도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불빛」을 투고하여 당선작 없는 가작 입선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력이 나빠 세 번이나 무종을 받은 끝에 병종을 받아 병역 면제가 되었으나, 취직할 데가 없어서 대구로 내려가 허송세월했다. 그러던 중 과 동기동창 이동렬(서울대), 홍재성(연세대)의 전보를 받고 상경, 유네스코에 취직했다.
1971 유네스코에서 물러나 서울 통상주식회사에 입사했으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퇴했다. 자신이 매일 출근하여 도장 찍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동숭동 하숙방에 들어앉아 생각을 거듭했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거리를 방황하였다.
1972 서울대학교 대학원 불문과에 입학. 대학 졸업 후 3년간 사회 실습을 하고 다시 학문의 세계로 돌아왔다.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불어 강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시간수가 모자란데다 교사 자격증이 없어서 강사의 신분이었다.
1974 대학원 졸업. 석사학위 논문은 「생텍쥐페리에 있어서 생명과 생성」.
1975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별수가 없어서 1년을 놀았다. 지도교수인 고故 이휘영李彙榮 교수의 소개로 전북대학교 교양과정부에 주당 9시간을 얻어 대학 강단에 처음 섰다.
1976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에 전임강사 발령을 받게 되었고, 이해 말에 직장 동료인 김갑영金甲英과 맞선을 봐서 결혼했다.
1977 단편 「질주疾走」 발표. 대학 동기동창이나 나이가 10살이나 많아 동기들이 어려워했던 윤재근尹在根을 혜화동로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자신이 안수길 선생을 잘 안다고 해서 나를 안 선생 댁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소설가가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단편 「잃어버린 황혼」 「파도」 발표. 안수길 선생이 갑자기 타계하여, 박연희 선생이 추천 완료. 서울대에 신제 박사제도가 처음 생겨 입학하였다. 광주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올라와 강의를 받았다.
1978 단편 「추락인墜落人」 발표. 쌍둥이 아들 태린泰隣, 재린在隣 출생.
1979 단편 「회색灰色더미」 「부재자不在者」 「흩어진 공간」 발표. 단국대학교 인문대학 불문과로 직장을 옮겼다. 이후 전남대 교수인 아내와 주말부부로 살며 쌍둥이 아들들과도 주말에만 만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조교수로 승진. 한남동에 방을 얻어 하숙을 했다.
1980 단편 「환상여행」 「검은 줄무늬」 발표. 박사과정 수료. 성북구에 15평짜리 아파트를 샀는데, 서울로 유학 온 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아내, 공주사대로 직장 옮기다.
1981 단편 「포구의 숲」(발표 당시 제목은 「죽음의 숲」) 발표. 장편 『천년을 내리는 눈』을 『현대문학』에 연재. 『현대문학』 편집장이던 김국태는 나의 투고 장편을 ‘거절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다고 후에 술회했다. 프랑스 외무성 초청으로 프랑스에 건너가, 그르노블 문과대학 박사 과정에 등록.
1982 아버지 타계(63세). 프랑스 그르노블3대학에서 「생텍쥐페리의 자연관 연구(L’idee de la nature dans chez antoine de Saint-Exupery)」로 박사학위 취득.
1983 단편 「출근」 「망각의 나라」 「왕릉王陵」, 중편 「슬픈 귀국」 「쌀 안치는 소리」 「밤바다」 발표. 장편소설집 『천년을 내리는 눈』 출간. 문인협회 가입. 김동리 선생을 처음 뵘. 부교수로 승진.
1984 단편 「호수가 있는 마을」 「팔씨름」 「점點」 「백제로 가는 길」 「회색 지도」, 중편 「돌아오지 않는 섬」 발표. 쌍둥이 아들 공주교대 부속초등학교 입학. 소설 동인 『작가』, 펜클럽 가입.
1985 중편 「아테네 가는 배」 「뜨거운 강」, 단편 「묘족苗族을 찾아서」 「부여에 가서 죽다」 「동숭동 시절」 발표. 제1회 ‘윤동주문학상’ 수상(수상작 「뜨거운 강」). 제17회 ‘동인문학상’ 수상(수상작 「아테네 가는 배」). 단국대학교 대학원 교수로 부임.
1986 중편 「혼혈의 땅」, 단편 「나루터 사람들」 「흐르는 성城」 발표. 작품집 『아테네 가는 배』 출간. 단국대 대학원 부교수 부임.
1987 중편 「암야暗夜의 집」 「겨울 강」, 단편 「떠도는 혼」 발표.
1988 제1회 만우 박영준문학상 수상(수상작 중편 「말」). 중단편소설집 『뜨거운 강』(도서출판 동아), 『타인의 시선』(청림출판사) 출간.
1989 장편소설 『악령의 집』(고려원) 출간. (처음 발표 때는 『죽음의 집』이었다. -편집자 주)
1990 중단편소설집 『혼혈의 땅』(친우출판사) 출간, 장편소설 『여자의 城』(세계일보사), 『안개 내리는 江(상하)』(열린책들) 출간.
1991 중단편소설집 『벼랑에 매달린 사내』(동아출판사) 출간, 장편소설 『가르마 탄 여인(상하)』(조선일보사) 출간.
1992 장편소설 『제비꽃』(자유문학사) 출간.
1993 장편소설 『최후의 연인』, 『사랑의 원죄(상하)』(중앙일보사) 출간.
1994 제29회 월탄문학상 수상(수상작 대하소설 『대동여지도(전 4권)』(자유문학사)).
1996 장편소설 『여자의 城』(도서출판 벽서정), 『운명』(도서출판 벽서정) 개정판 출간.
1997 장편소설 『태양인(상하)』(열림원) 출간.
1999 『두 아내(상하)』(찬섬출판사) 출간.
2004 장편소설 『두 아내』 프랑스에서 『Les deux epouses』(프랑스 La maison neuve et la rose사) 불어판으로 출간. 한국문학번역원 지원.
2005 장편소설 『바람의 여인』(실천문학사) 출간.
2006 창작동화 『구파발 할아버지』(자유지성사) 출간.
2009 단국대학교 정년퇴임(명예교수).
2012 제8회 류주현문학상 수상(수상작 장편소설 『설향』(시와 에세이사)). 영어판 『The Fate』(『운명』), 「The ship bound for Athens」(「아테네 가는 배」), The island of no return(「돌아오지 않는 섬」)(Sohaksa) 출간. 아내 김갑영 공주대 정년퇴임(명예교수).
2015 장남 태린과 현정 결혼, 태린 연세대학교 스포츠마케팅 박사학위 취득
2016 차남 재린, 미국 오하이오 주립 켄트대학 지리학 박사학위 취득.
2018 장편소설 『건널 수 없는 강』(실천문학사) 출간. 장남 태린과 현정의 첫아이 손녀 여진 태어남. 차남 재린과 모핀 메리 결혼.
2019 정소성 문학전집 33권 출간 진행(문예바다)
2020 10월 24일 신촌
정소성 문학전집을 내면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의식의 결실
내가 『현대문학』 추천으로 소설가로서 문단에 데뷔한 것이 1977년이니 올해 42년째이다.
이 긴 세월 동안 나의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정소성 문학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기로 결정하였다. 총 33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전집 출간의 이 순간에 나는 왜 일생 소설을 썼을까 하는 자문에 사로잡힌다.
이 자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당시 나는 영남 명문고교의 소속 학년 300명 중 5등 안에 드는 양호한 성적을 유지했다. 그래서 당시 주변 사람들이 선호하는 서울 모대학 법대에 입학해서 고시에 합격할 수 있는 학생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실직으로 집안이 아주 어려워져 대학 진학이 불가능해졌다.
나는 고향 봉화로 내려가 친척집에 기식하면서 고시를 고학으로 돌파할 결심을 했다. 가끔 잠시의 휴식을 위해 소설책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이 당시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김동리의 「등신불」과 손창섭의 「잉여인간」, 이상의 「날개」, 선우휘의 「불꽃」 등은 나의 뇌리를 때렸고 나의 가슴을 울렸다. 나의 영혼 속에 잠들어 있던 문학의 혼을 일깨웠다. 영혼을 파고드는 그 짙은 감동의 울림은 나를 법학도의 길에서 문학도의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고교 재학 중 선두그룹을 이루어 성적을 다투던 나는 국어과목만큼은 별다른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만큼 성적이 출중하여 기이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서울에서의 고학을 결심하고 난 후, 문학도로서 문창과로 가느냐 외국문학과로 가서 좀 더 넓은 독서와 안목을 넓히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어떤 조언자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나 나는 스스로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를 선택했다.
불문학과에 진학하고 보니, 소설가의 길과 학자의 길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가로는 당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오상원, 김승옥 등이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김현, 김치수, 김화영 등이 4학년에 재학하면서 평론가로서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어서 교수 후보군에 올라 있었다. 학자의 길은 석?박사과정과 프랑스 유학을 통해 교수가 되는 길이다. 이 길에는 대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기고 출신 동기 선후배들과 경쟁을 해야만 했다.
집안이 어려워 가족의 지원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당시 지방 출신 문리대 학생들의 유일한 학업 가능의 사회적 기능이던 입주가정교사로 여러 가정을 수없이 돌아야 했다. 나의 월급은 지방 식구들 호구용으로 우송되었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았는지 인덕이 있었는지, 불문학과의 동기생들 중에서 홍재성(서울대 교수 정년, 학술원 회원)?이동렬(서울대 교수 정년) 등 동기생들과 출신 지방고교(경북대학교 사대부속고, 구 대구사범) 동기생인 이태식(외교과, 주미대사 역임, 자기 등록금으로 내 등록금 내주고 자신은 한 학기 휴학), 고교 동기생은 아니지만 동향(대구)인 권무수(정치과, 국민대 교수 정년)?윤재근(영문과, 한양대 교수 정년) 등과 고교 동기생 송무광(사업가, 대학원 4학기 등록금 전액 지원) 등의 적극적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나는 문리대 2학년 때 서울대학교신문 신춘문예에 「불빛」이라는 단편으로 당선되어(심사위원 전광용?홍사중) 동기생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소설가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위 홍재성의 적극적인 이끎으로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불어담당 간사로 취직이 되었고, 2년 후 김치수 선배의 추천으로 중앙고교 불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윤재근의 적극적인 소개로 『현대문학』에 연결되어 초회 추천(안수길, 단편소설 「질주」), 추천료(박연희, 단편소설 「잃어버린 황혼」)의 코스를 완료했다.
이후 지도교수이시던 이휘영 교수님의 추천으로 전남대학교 사대 불어교육과에 발령을 받아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었다. 직장 내의 동료교수들의 후원으로 미혼교수와 혼담이 잘 진행되어 오래고 오랜 떠돌이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이후 단국대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문단 데뷔 8년 만에 『현대문학』지에 첫 장편 『천년을 내리는 눈』을 연재하는 행운을 얻었다. 당시 문단사정으로 보아 이루어지기 힘든 사실이었다. 김국태 편집장과 조연현 주간의 배려가 컸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전집의 제1권으로 선정되어 감개가 무량하다. 장편소설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문단 초딩이라 자연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이다.
공개하기에는 조금 주저되지만, 나의 동인문학상 수상(17회)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수상자를 선발하기 위한 최종심사석상에서 K 모씨가 선정되었다. 집으로 귀가하신 심사위원 중 한 분이시던 선우휘 선생은 자신에게 막 배달된 『문학사상』을 펼쳐 들고 제목을 훑던 중 「아테네 가는 배」라는 작품의 제목에 이상한 흥미가 느껴져 읽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튿날 선우휘 선생은 지체 없이 그해 동인문학상 심사를 재심하자고 다른 심사위원들(김성한?김동리?황순원)에게 요청하였고, 그 이유로 정소성의 졸작의 발견을 들었다. 한 달 후 재심하여 수상자가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기 수상 결정되었던 분에게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로서의 나의 일생은 자신의 생각으로는 썩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그 근본원인은 서울에 위치한 나의 직장(단국대학교)과 충남 공주(공주사대)에 위치한 집사람의 직장이 서울과 지방이라 거기서 오는 불편함이 컸다는 사실이다. 생활의 안정감이 덜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지속적인 연구와 연마가 필요한 외국문학 전공자라는 사실이다. 외국문학 자체가 전력투구를 요했다. 더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한 원대한 전망으로 프랑스문학을 선택했으나 나에게 너무 많은 시간의 로스를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 초청으로 유학 가서 학위 공부하느라 빼앗긴 시간을 생각하면 장편소설 두세 편은 더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생각하고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나 나의 소설가로서의 타고난 성향이 사정없이 나를 소설 창작업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주제를 심화시키기 위해 사건을 만들고 주인공들을 배치하면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나의 소설가로서의 꿈과 인간에의 사랑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이 전집은 단편소설집 7권과 장편소설 15권, 영문소설전집(번역본) 1권, 불어 번역본 1권 등 총 24권이다.
그러나 위 24권 중 5권은 상?하로 되어 있어 5권이 늘어나고, 대하소설 『소설 대동여지도』는 4권으로 되어 있어 총 32권이 된다. 여기다가 출판사 측에서 에필로그 한 권을 덧붙인다고 하니 한 권이 늘어나 총 33권이 된다.
흔히들 소설가는 죽어서 소설 작품을 남기고 운 좋은 사람은 문학관을 남긴다고 한다. 그러나 문학관은 장담할 수 없다. 일단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이 남겨진다고 하더라도 그 수명을 장담할 수 없다. 일단 창립되어진 문학관이라 하더라도 운영비가 지속적으로 든다. 운영비가 개인적이거나 공적 기관에서 지원된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지원은 영속성이 없고, 공적 기관의 지원은 교체되는 정권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관이 창립된 소설가보다 훨씬 유능한 소설가 시인들이 다음 세대에 계속 배출되기 때문에 기존의 문학관은 그 위상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세대의 문학애호가들은 흘러간 세대의 소설과 시에 계속 매달리지 않는다. 최근 안성의 박두진문학관과 여주의 류주현문학관을 찾아보고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문학관 자체는 폐쇄되었고, 시립문화관 내의 작은 방 하나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축소된 상태로서의 규모를 얼마간 유지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소설작품을 남길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소설가든지 죽음과 동시에 길고 긴 망각으로 빠진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의 세찬 파도를 뚫고 끝까지 살아남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작품의 향기가 세월의 흐름을 이기고 살아남기 때문이다.
문학전집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전집도 어차피 세월 속에서 망각으로 빠지긴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후세의 독자들에게 좋은 읽을거리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문학전집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걸작인 스탕달의 『적과 흑』도 완전히 망각되어 잊혀질 뻔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스탕달의 고향 도서관에 남아 있었고, 이것을 읽은 후세 국어선생님 한 분이 소설의 감동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 중에 후세 실증주의 평론가로 이름을 떨친 이뽈리트 텐느가 있었다. 텐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적과 흑』을 거론하여 이 작품의 우수성을 알렸다. 텐느의 노력으로 이 소설은 서머세트 몸에 의해 세계 10대 소설로 뽑혀 그 생명을 영구화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사후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모든 작품이 전집화되어 파리 국립도서관의 서가에 꼽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르트르의 소설들은 몇 작품 되지도 않지만 재미가 없어서 사후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점을 사르트르가 염려했을 것 같다.
전집화한다고 하여 모든 문학전집이 국립도서관의 서가에 진열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도서관대로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기준에 통과되어야 한다. 도서관은 도서관대로 진열공간의 제한으로 엄격한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인간의 길고 긴 망각의 켜를 뚫고 자신의 작품을 영구히 남기고자 하는 소설가 시인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미국 국회의 도서관은 매일 자동차 열 대 분량의 서적을 실어 내어 불태운다고 한다.
나의 졸작들의 전집을 출판하는 출판사(문예바다, 김동리 문학전집 출간) 측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전집 출간과 아울러 ‘디지털 정소성 문학전집’을 같이 만들기로 계약하였다. 서책의 점유공간 협소라는 이유로 서책전집이 도서관 서가에서 퇴출되는 경우를 예상하는 조치인 것 같다.
나의 문학전집은 오로지 같은 동료 소설가이시고 출판사 경영주이신 백시종(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역임) 씨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도 나의 졸작들을 읽을 것 같지 않았지만, 백 선생은 문단의 일우에서 말없이 나의 졸작들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나의 연치가 깊어 감에 따라 나에게 전집 출간의 의향을 물어 왔다. 나는 기꺼이 호응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2019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