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4년 제주도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셋아버지, 장차방(張次方)] 밑에서 자랐다. 글공부를 좋아해 일찍이 향시에 몇 차례 합격했다고 한다. 1770년(영조 46년) 10월에는 향시에서 수석으로 합격을 하자, 마을 어른들과 관청에서 여비를 도와주어 서울 예조(禮曹)에서 실시되는 회시(會試)를 치르고자 뱃길에 올랐다.
그러나 느닷없이 풍랑을 만나 남쪽 큰 바다로 표류하면서 유구 지경까지 떠내려갔다가, 안남(월남) 상선을 얻어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멀리 한라산이 보이자 장한철 일행은 반가운 나머지 큰 소리로 떠들며 웅성대었다. 그러자 왕자들이 죽임을 당한 옛 원한을 지닌 안남 사람들에 의해서 이들은 돛도 없는 배에 실려 바다 한가운데 버려졌다. 다시 표류하다가 가까스로 전라도 완도군 청산도에 닿아 목숨을 건졌다. 모두 스물아홉 명의 일행 중에서 고작 여덟 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몸을 회복하고서 이내 서울로 가서 회시를 치렀다. 그러나 낙방하고 곧장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마 ≪표해록≫은 표류 당시에 겪은 온갖 어려움을 회고하면서 이때 적어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지은이가 27∼28세 때인 셈이다. 1774년(영조 50년) 제주에서 베푼 승보 초시에 다시 합격하자, 특별히 회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시에 응시하도록 하는 은혜를 입는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1년 1월 30일 조에 보면, 홍문관 제학 이담에게 제주도의 과거 시험지[道科試卷]의 성적을 매기도록 했다. 1764년(영조 40년)의 전례에 따라, 강봉서·장한철·김경회 3인을 뽑아 급제를 내려 주었다.
‘보주 문과 방목’에 보면, 1775년(영조 51년) 32세의 나이로 문과 별시(別試) 병과(丙科) 27위로 급제했다. 장한철은 급제한 뒤에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정조 원년(1776) 12월 성균관 학유(學諭)를 거쳐 학정(學正)·박사(博士)·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정조 4년(1780)에는 이조의 가낭청(假郎廳)을 지냈다. ≪승정원일기≫ 6월 25일 조에 보면, 이듬해 1781년에는 이조에서 외직에 진급시키도록 청함에 따라, 처음으로 강원도 상운역(祥雲驛) 찰방(察訪)으로 발령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승정원일기≫ 정조 7년(1783) 11월 10일 조에 보면, 임금이 지방 수령의 선정을 권장하는 뜻에서 상운찰방을 특별히 강원도 흡곡현령으로 발령 내도록 전교를 내렸다. 또 그해 9월에는 영조 임금의 존호(尊號)를 올리는 제사에서 장한철이 집박 전악(執拍典樂)의 임무를 맡아 노래를 불렀으므로, 1783년(계묘년) 예에 따라서 가자(加資)되었다. 정조 11년(1787) 5월 22일과 23일 조에, “강원도 감사 김재찬이 장계를 올려… 흡곡현령 장한철이 스스로 22석을 마련하여 진휼에 보탰다”고 했으므로, 꾸미지 않은 활[不粧弓] 한 장을 내려 주었다.
≪승정원일기≫ 정조 11년 11월 5일 조에 보면, 장한철을 제주도 대정현감으로 임명했다. 그렇지만 이듬해 10월 유배 죄인 김우진(金宇鎭)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고 해서 의금부로 끌려갔다. 정조 13년(1789) 3월 26일 조에 보면, 사복시 관원이 아뢰기를, 전 대정현감 장한철이 체임하면서 진상한 말 두 마리가 도착하자 전례에 따라 대궐 마구간에서 치도록 아뢰고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1일 조에 따르면, 정례적인 절차에 따라 이조(吏曹)에서 장한철의 죄를 줄여 주도록 요청하는 단자[張漢喆 歲抄單子]를 올리자, 임금이 관직에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蕩滌敍用]. 정조 16년(1792) 12월 18일 조에 따르면, 다시 장한철을 평시주부(平市主簿)로 임명했다.
장한철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장담(張?)은 정조 19년(1795) 9월 1일 제주에서 열린 향시에서 시(詩) 부문에 삼하(三下)로 합격했다. 장담이 ≪표해록≫에 나오는 맏아들 장봉득(張鳳得)과 동일한 사람인지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현재 장한철의 직계 후손들은 북녘 땅에 있는 강원도에 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