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시인인가,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또 한 번 실수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그냥 조용히 넘어갈 일이지 뒤늦게 시집을 내다니…. 또 한 번의 실수를 내 인생에 추가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회의가, 시집 원고를 넘기고 나서도, 불쑥 치솟는 밤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밤을 새우기도 한다. 인생에 길목마다 있었던 일들을 실수로 치부하고 산 사람에겐 당연한 회의와 망설임이다.
그렇다면 시를 쓴 것 자체가, 문학을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실수였을까? 1959년 (고등학교 졸업반 때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신동엽과 함께 시인으로 데뷔한 것도 실수에 속한다면, 60년대 중반 군사정권 치하에서 눈치 보기 싫어 이를 악물고 감행한 절필도 지금 생각하면 실수에 속할 수 있다.
어쨌든 실수에 실수를 무릅쓰고 시집을 내는 실수를 또 저지른다. 시인이고 우리나라에선 드물게 유능한 잡지인인 월간see의 민윤기 편집인의 간곡한 권유로 시집을 묶으면서 나는 또 한 번의 실수를 생각해낸다. 금년 정초 방송을 통해서 금년에 시집 내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것까지 실수로 밀어붙이고 싶진 않다.
이 시집의 1.2.3부 분류는 나로서는 의미가 깊다. 1부는 절필한 지 거의 30여 년만의 시들이다. 그동안 ‘직장생활’ ‘여원’ ‘소설문학’ ‘신부’를 비롯한 몇 개의 잡지 경영, 그리고 처절한 경영실패 등 시와 좀 먼 거리에 있다가 거의 30여 년 만에 쓴 시들이다. 2부는 결혼하고 생활인이 되어 가급적 조용하려고 애쓰면서 쓴 시들인데, 나도 모르게 불끈불끈 치솟은 불길이 거칠게 나타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리고 3부는 저항시인이란 렛델을 달고 살던 시절, 물 불 안 가리고 겁 없고 그야 말로 붙들려 다니면서, 그야말로 죽일 테면 죽여라 하고 쓴 시가 대부분인데, 지금은 그것까지도 실수로 치부하고 싶은 심정을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만 바란다.
데뷔한 지 60여 년이 다가오지만, 그동안 딱 한 번 여원사 발행인 시절, 그러니까 1980년 봄에 시집 준비를 했다. 인쇄 직전까지 갔다가 5.18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또 군사정권이 시작되는 바람에 인쇄용 대지를 불질러 버렸다. 그래도 시를 대하는 자세만큼은 참 엄격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쓰지는 않더라도 시를 모욕하지는 말자는 생각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많은 분들에게 신세도 지고 실망도 주었다. 기분은 아직 소년 같아서 처녀시집을 낸다는 사실에 대해 두근거림과 수줍음이 앞선다. 그리고 시집을 내는 지금까지 여러분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데 대해 감사한다. 특히, 항상 희망의 메시지만을 보내준 ‘기쁨 세상’의 이상헌 선생, 많은 도움을 준 (주)인산가 김윤세 회장(광주대학 대체의학과 교수)에게 감사한다.
괴롭고 기나긴 인고의 시간 동안 곁에서 나를 어질고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봐준 아내와, 아버지의 무참한 실패에도 자랑스럽게 성장해준 장남 진세(고려제일정신과 병원 원장), 딸 희진(경희궁한 의원 원장), 차남 윤세((주)핀란디아 대표이사), 사위(김종구), 며느리(조용주, 유선영), 그리고 무럭무럭 잘 크고 있는 손자손녀들에 게도 감사하고, 참 부끄럽다.
2014. 해 넘어 가는 12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