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무자년戊子年 한여름 밤, 광산 김씨 부친과 남평 문씨 모친 사이에 셋째딸로 태어났다. 조부께서 아들이면 좋겠다며, 여식인데도 항렬 얼굴용容을 넣어 용옥容玉이라 작명하셨다. 시인 묵객과 운동선수와 지역유지들이 들락거리는 우리 집안엔 詩書藝樂이 풍부했다.
4.19민주혁명을 치른 중학생 때부터 독서삼매에 빠졌고 캐서린 맨스필드, 오스카 와일드, E. 헤밍웨이, J 스타인벡, 잭 케루악에 빠졌다. 이리남성여자고등학교 3학년 때, 헤밍웨이 연구의 대가 김병철 교수와 A. 크리스티 번역의 일인자 이가형 교수의 장학제도 권유에 따라,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지원했다. 참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얼토당토않은 결혼으로 ‘지루하고 아픈 대하소설’을 실생활로 사느라 90%의 나를 포기했다. 중허리에 백 프레스를 입고 1시간 이상 섰거나 걷는 것도 삼가라는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세상과의 끈은 어린 자식, 모성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어느 날, 착한 콩쥐에게 유리구두가 신겨졌으니 문학이라는 신발이었다. 준비된 손이 연필을 쥔 것이다.
1972년부터 신문기자 친구의 권유로 신문글을 땀땀 썼다. 1978년 ‘전북여성백일장’의 인연이 닿아 시재詩才 글재주를 인정받고, 1980년에 최승범 선생이 <전북문학>에 추천, 전북문인협회에 입회했다. 시류에 합류하느라고 1988년에 역사적인 詩文學誌 <시문학>에 문덕수 선생의추천 완료로 재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되었다. 곧 국제PEN한국 위원회에 입회했다. 불혹부터 드디어 수필을 썼으니, 그 시작은 <전북수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오직 나를 초극하고, 속된 세상을 초월하기 위해 도전하고 실험하며 시와 수필을 썼다. 문학으로 종교를 뛰어넘고 철학을 사유하고 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다. 이전의 문학에서 한 걸음 나아가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