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섣달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저녁 6시』 『경쾌한 유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은 어깨로 운다』, 시선집 『길 위의 식사』, 산문집 『생의 변방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집착으로부터의 도피』, 시평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가 있음.
윤동주문학대상, 소월시문학상,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우수상, 풀꽃문학상, 송수권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주)천년의시작 대표이사.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있다. 인간 경험의 극한 속에서조차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저자에게 무한 존경심을 느끼면서도 살짝 반감이 들기도 한다. 저자의 최대치의 체험에 비하면 우리가 나날의 곤궁한 일상 속에서 겪는 희로애락은 얼마나 사치한 것인가? 매 순간 죽음에 직면한 저자는 말한다. 인류에게 사랑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고! 극한 상황 속에서 행하는 사랑은 인간 존엄을 증명한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 자문해 볼 일이다.
잘 늙는 일이 쉽지 않다. 질풍노도와 같은 청년처럼 벅차다. 그저 나이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다. 지혜로운 어른으로 여유를 만끽하며 살 줄 알았다. 욕망을 비우고 허허롭게 관조하며 살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오래된 귤처럼 즙이 빠져나간 거죽은 딱딱한 채 몸체는 오그라드는데도 욕망은 구멍처럼 팔수록 커지고 그런 욕망이 징그러워 애써 저만큼 밀어내면 이번엔 권태의 오랏줄이 영혼을 칭칭 감아 왔다. 잘 늙는다는 것, 고산을 쉬지 않고 오르는 일처럼 고된 일이다. 지금의 나는 젊은 날의 내가 그리던 내가 아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기 자랑, 자기선전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는 노인뿐, 어른다운 지혜와 겸손이 없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동일한 삶의 패턴, 동일한 생의 궤도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발견과 새로운 인식을 통한 삶과 생의 개진은 언어의 틀을 바꾼다. 문자 행위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 변신을 꿈꿔야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새 내게 새롭게 생긴 버릇이 있다. 오가다 우연하게 마주치는 온갖 사물들을 애정하는 것이다. 햇빛도 아까워 일부러 손 뻗어 만져 보기도 하고 강물을 한참 동안 무연히 굽어보기도 하고 철마다 피는 꽃들을 찾아가 살뜰하게 살펴보기도 하고 바람을 있는 힘껏 마셔 보기도 하는 것이다. 심상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새삼스레 귀하게 다가오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징조이리라. 어찌 보는 일뿐이랴, 소리, 냄새, 촉감까지도 예사롭지가 않다. 세상을 떠나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저것들을 나는 친애하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의 가치가 높고 깊다. 사물이여, 나의 애인들이여, 열애의 하루가 짧기만 하도다.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갈림길에는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서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다시 읽으며 우주에 대한 상상에 젖곤 한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나무와 인류의 조상이 같다’라는 대목을 읽고 난 뒤로 산책 중에 만나는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내 생의 근원인 광활한 우주 속으로 흘러들 것이다. 지구는 우주에서 나온 우리가 잠시 지나가는 여정에 불과한 한 지점일 뿐이다. 여정 속에서 숱한 인연들이 고리를 맺고 풀면서 내 곁을 스쳐 지나갔거나 지나는 중이다.
내 사후의 산책로인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 저 먼 곳에 내가 영원히 안식을 취할 집이 있도다. 나는 지금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