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나라에서 산다는 것
가정 해체 위기에 놓인 아이들과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는 아이들을 다룬 프로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가출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세상 밖에 던져져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껌 씹고, 다리 떨고, 교복 줄여 입고, 원조교제를 하고……불량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비난한 ‘윤서’들에(「키스하러 가자」의 화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계를 위해 위태롭게 살아가는 ‘윤서’와 같은 아이들이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내쳐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부채의식으로 작품을 썼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단한 화자들에게 더 이상 절망하지 말자고, 어깨 다독이며, 나 또한 그들에게 위로받고 싶다는 따뜻한 말로 작가의 말을 끝맺고 싶었다.
하지만 창작집에 들어갈 원고를 다듬는 사이, 삼백여 명의 목숨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그 충격은 오래 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작가의 말을 쓰다 지우다 결국 세월호 얘기를 쓰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빼앗겼다.
지난 5월 여든두 살인 어머니의 생신을 그냥 넘겼다. 어머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도, 갖고 싶은 것도 많지 않다. 자식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지내면 그것으로 족하신 분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일 년에 한 번 당신의 생일에 자식들, 손녀들과 함께 야외에 나가 밥 한 끼 먹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때같은 자식들을 수장 시키고, 아직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가족들이 있는데 웃고 떠들고 생일 ‘밥’을 먹는 것이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다”며 조용히 넘어가자고 했다. 미역국도 먹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비겁하여 분노는 많으나 실천은 잘하지 못한다. 슬픔을 함께 나눴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유가족인 김영오 씨의 단식이 길어지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고도 나는 밥을 먹고,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여행을 다니며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김영호 씨가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보면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단식을 했다.
“내 딸은 나라를 위해서 밥을 굶는다는데 늙은 에미가 살겠다”고 밥을 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어머니는 하루에 한 끼만 드셨다. 보릿고개를 넘어온 어머니가 밥을 굶는다는 건 엄청난 큰일인 것이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나는 이것으로 또 스스로를 위안했다.
“내 가족이 왜 죽었는지, 왜 살아오지 못했는지 밝혀”달라고 찬이슬을 맞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여든두 살의 어머니는 그 법을 왜 만들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수사권이니 기소권이니 법적인 것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어머니의 또 다른 자식들과 손녀들을 위해서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바로 당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꽃과 나무, 산과 바다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싶다. 내년 어머니 생신에는 가족들이 모여 마음껏 웃고 떠드는 기쁨을 선물해드리고 싶다.
295번째 황지연 양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뉴스를 접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종자가 아홉 명이나 있다.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를 기다리는 슬픈 나라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