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변두리를 찾아가 묵묵히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후 꽤나 긴 시간 동안 묵혀 두었던 소설들을 이제야 한 곳에 모아 첫 소설집을 묶었다. 여기에 수록된 소설들 중 거의 절반은 발표한 지 육칠년을 훨씬 넘긴 것들이다. 소설집을 출간하기로 결심하고 출판사에서 교정본으로 보내온 원고를 다시 읽으며 나는 ‘그 시절’ 생각에 빠지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자신에게 그리 친절하지 못했고, 또 내 삶이 초라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되도록 나를 둘러싼 일상적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서글픈 단상에 집중하려는 자장(磁場)을 벼려두고 있었고, 고도(故都)의 변두리를 자주 찾아가 묵묵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내게 소설을 남겨주었다. 부족한 능력이었지만 만성질환자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챙기는 약처럼 꼬박꼬박 나는 소설을 썼다. 그때의 나는 소설 때문에 힘들었지만 소설을 쓰고 있다는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의 출근길에 맞춰 소설을 쓰려고 나서는 아침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무언가 지정된 일을 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퇴근길에 맞춰 하루치의 원고를 다 쓰고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밤의 공기는 상쾌했다. 나는 소설 덕분에 저녁이 즐거운 호사스러운 한 세상을 보낸 것이다. 앞으로도 삶과 창작은 그리 녹록치 않겠지만 나는 소설을 계속 쓸 작정이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하겠다.
여전히 나는 소설과 여러 사람들에게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먼저 사반세기의 시간 동안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시고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신 박덕규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 가족들은 친가, 처가 할 것 없이 대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천변에 옹기종기 모여 삽니다. 조금만 길을 나서도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이 얼마나 따스하고 든든한 일인지 자주 깨닫습니다. 큰 병환을 이겨낸 빙모 김명혜 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푸근하고 인자한 미소가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자식들을 그늘 아래 두고 있어 아직도 큰살림을 살아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께는 늘 죄송스럽지만, 덕분에 지금의 나와 내 식솔의 삶이 평온하다는 것을 늘 가슴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항상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2023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