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경보, 호는 석문, 본관은 동래이다.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경학과 당시에 조예가 깊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조성된 서석지는 한국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저서로는 '석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