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고,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덕에 친구들이 많았다. 집안에서는 여섯 형제 중 장남인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법관이 되길 바랐지만, 정작 본인은 정적인 직업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했다.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물리치료학과로 진로를 바꿨다.
졸업 후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은사님의 소개를 받고 카타르배구대표팀의 의무팀에 지원, 선수트레이너가 되었다. 1982년부터 카타르에서 활동하면서 비시즌에는 미국의 스포츠 현장을 찾아 선수트레이너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키워나갔다. 10년 동안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수트레이너를 그만두고 지인과 함께 사업에 몰두하다가, 뒤늦게 선수트레이너가 자신의 천직임을 깨닫고 1994년 대한축구협회의 의무팀장으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후 2012년 3월까지 19년 동안 근무했다. 그간 네 번의 월드컵, 네 번의 올림픽, 네 번의 아시안컵, 다섯 번의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회를 경험했다. 300여 회가 넘는 A매치를 치르며 수많은 축구대표선수들을 돌보았다. 경기 중 부상선수가 발생하면 몸 상태를 파악하고, 간단한 응급처치를 했다. 큰 부상을 당한 선수에게는 맞춤식 재활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부상선수와 똑같이 훈련을 수행했다. 선수트레이너는 육체적인 부상뿐 아니라 심리적인 부상까지 치유해주어야 한다는 일념 아래 선수들과 함께 땀 흘리고 호흡했다. ‘미다스의 손’, ‘대표팀의 어머니’, ‘저승사자’, ‘대표팀의 엄마손’ 등 다양한 그의 별명에는 함께 재활훈련을 한 선수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한선수트레이너협회의 총재와 명예총재를 거쳐 현재 고문으로 있으며, ‘최주영 스포츠재활클리닉’을 운영하며 축구대표선수를 꿈꾸는 어린 선수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또한 후학 양성을 위해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2012년 지금도 30년 넘게 선수트레이너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