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추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불긍거후(不肯車後)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노라. 우봉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말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학문과 글씨 그리고 문인화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가히 천하제일, 조선의 제일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들이다.
예산이 고향인 나는 추사 김정희선생의 삶을 소설로 그려내고 싶었다. 그것은 마치 내게 있어 하나의 의무와도 같았다. 그리고 추사선생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그분의 언저리를 배회하던 중 우봉 조희룡선생이 눈에 들어왔다. 치열했던 그분의 삶과 예술세계를 알고 나자 추사와 우봉을 함께 그려내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묵장의 영수 추사 김정희와 우봉 조희룡, 그분들의 삶과 예술에서 우리는 조선의 정체성과 조선인의 절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던 세한의 절개와 불긍거후(不肯車後) 하리라던 경시위란의 치열했던 삶, 이것은 허접한 인간이 감히 범접치 못할 것이었다. 서로 대립각을 세운 채 예(藝)의 길에서 지조와 절개를 앞세워 치열한 삶을 살았던 묵장의 영수 추사(秋史)와 우봉(又峰). 특히 추사의 글씨는 조선의 것을 넘어서 천하의 것이 되었다. 요즘 들어 불고 있는 한류의 원류가 바로 이 분이 아닌가 한다. 추사체 한 점을 얻기 위해 왜와 청에서 국경을 뻔질나게 넘나들던 사람들, 추사의 글씨로 모자란 책을 채우고자 했던 연경의 학자, 보지도 못한 추사를 그려 보냈던 사람, 불후의 명작 세한도에 먼저 찬을 적겠다고 요란을 떨던 연경의 청유 16인까지, 추사는 조선만의 추사가 아니었다. 천하가 흠모하고 받들던 추사였다. 조선말의 위대한 한류의 시작이었다.????
이 소설을 통해 추사와 우봉의 뛰어난 예술세계와 치열했던 삶이 좀 더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세한의 절개와 고절한 부작란으로서 선비와 사대부의 정신을 지켜내고자 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조선인의 조선인다움과 조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했던 우봉 조희룡(趙熙龍). 이분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나는 뜻하지 않은 글씨와 그림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매화와 난도 알게 되었다. 붓으로는 쓰지 못하고 그려내지 못하지만 텍스트로 살려내는 나의 추사체와 문인화가 독자들에게 신선한 아름다움으로 다가갔으면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가까이 있는 추사고택을 몇 번이나 찾아갔는지 모른다. 눈이 오는 날은 눈이 와서 가 보았고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가보았으며 화창하게 맑은 날은 날이 맑아서 또 가보았다. 짧게는 몇 십 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까지 앉아 생각에 잠긴 적도 있었다. 추사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그 분이 거닐었을 길도 거닐어 보았고 추사고택 사랑채에 멍하니 앉아있었던 적도 있었다. 추사고택은 물론 화암사와 병풍바위까지 그 분의 자취와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창밖으로 소복이 쌓이던 눈과 따스한 햇살아래 돋아나던 풀잎들 그리고 나뭇잎들, 모두 정겹게만 느껴지던 시간들이었다. 짙푸른 숲속에서 더위를 이겨내며 추사의 글씨와 우봉의 매화를 텍스트로 살려내던 수많은 시간들이 이제는 더없이 소중한 날들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긴 시간동안 이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참으로 기뻤다.
예(藝)와 더불어 노닐었던 그 분들을 생각하며 보추재(寶秋齋)에서 표윤명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