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그저 일에 파묻혀 살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직업과 일이란 어쩔 수 없이 돈과 관련이 있어서 한 해 두 해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일 그 자체보다는 돈 버는 데 더 만족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과 일에 몰입되어 있던 삶에 염증을 느꼈다.
나의 가슴은 무덤덤해질 데로 무덤덤해져 그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권태로웠다. 이대로 살 것인가? 그대로 살면 그래 왔듯이 안전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내 삶을 죽여 가는 위험한 길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볼까? 새로운 시도는 늘 위험하다. 그러나 내 가슴은 다시 요동칠 것이다.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했다. 여행에 대해서 두 가지를 전제했다. 자유로울 것, 그리고 색다를 것. 그 두 가지 조건에 적합한 여행 방식은 어떤 것이 있을까?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할 수도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스쿠터를 한 번 타본 것이 전부였다. 오토바이에 문외한이었다. 125cc 이상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필요한 2종 소형 면허를 따고 오토바이를 구입해 겨우 3개월 정도 도로주행 연습을 하고선 2007년 6월 21일 아시아-유럽대륙 횡단에 나섰다. 오토바이를 오랫동안 타온 분들은 오토바이 주행기술이 아직 안정적이지 못하다며 나의 도전을 우려했다.
2007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국외로 오토바이 여행을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송 방법, 각 나라의 세관 통관 및 도로 정보, 장기간의 오토바이 유지 관리 등 검토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은 많았지만 내 주위에는 이와 관련해 내게 조언을 해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오토바이 주행 연습을 하던 중 만난 한 라이더가 2006년도에 오토바이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한 이가 있다며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강세환 군이었다. 나는 그의 경험담을 들으려고 2007년 5월 초순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와 많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대화가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 비록 첫 만남이었지만 그에게 아시아-유럽 대륙 횡단여행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는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2007년 여행의 동료가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 도전이었다. 아시아-유럽 대륙을 횡단하기로 한 까닭은 뭐랄까, 대륙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조금은 감상적이라 할 만한 정서가 크게 작용을 했다. 우리는 분명히 대륙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남북 분단 이후 섬나라 사람들처럼 살아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하는 답답함을 자주 느꼈다. 언젠가는 시베리아의 광활한 숲과 몽골의 대평원에 서서 내가 상상만 했던 거대한 대륙의 정수를 느끼고, 호흡하고 싶었다.
속초 동명 항 국제 여객 터미널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가는 배에 오르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여행을 내가 스스로 선택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 흥분된 마음은 나의 선택마저도 삶을 뒤흔드는 우연성이라는 요소의 결과로 치부할 정도였다. 그 순간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앞으로 내 앞에 벌어질 수많은 일을. 그리고 전 세계 5개 대륙을 오토바이와 함께 여행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시아-유럽 대륙 횡단 여행을 하면서 나는 오토바이 여행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밥을 먹으러 식당을 다녀온 사이에 길가에 세워 놓은 오토바이에 누군가 라는 쪽지를 남겨놓아 감격했었다. 러시아 알타이(Altai) 초원의 작은 도시 바르나울(Barnaul)에서는 주행 중에 차량 운전자가 생수를 건네주며 격려해줘 고무됐었다. 이탈리아 로마(Rome) 근교에서는 차량으로 남부 유럽을 여행 중이던 어떤 독일인이 휴게소에 도착한 나에게 다가와 시원한 맥주를 한 병 건네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기를 기원해 주었다. 오토바이 여행 중 어디서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동안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나에게는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007년 11월 24일 2만여 킬로미터 여정을 로마에서 끝내고 귀국하자마자 나는 다음 여행계획을 짰다. 아시아-유럽대륙횡단을 떠날 때 작정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광활한 대륙을 질주할 때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다른 대륙을 질주하고 있었다. 2차 여행은 한국에서 남아공의 희망봉까지였다. 거리는 4만 킬로미터 정도. 계획을 세우면서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희망봉까지 갈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이집트까지야 어찌해서 갈 수도 있겠지만, 아프리카, 그 미지의 대륙을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완주를 목표하되 중간에 변수가 생기면 핑계 삼아 그만두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좀 하면서 2008년 3월 27일 태국으로 오토바이를 공수했다. 그렇게 2차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1차 여행 때는 출발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사고를 당했고, 여행 말미에는 유럽연합(EU)의 자동차 보험 제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역시 2차 여행도 쉽지는 않았다. 동남아시아에서 인도로 가는 육로가 막혀 싱가포르에서 인도 첸나이(Chennai)로 오토바이를 배편으로 운송해야 했고, 이집트에서는 그 해 9월 말 극적으로 수단 비자를 받음으로써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를 내려가는 동안에는 사막 지역을 통과하면서 모래 속에 처박힌 오토바이를 빼내느라 두 번씩이나 클러치 디스크가 부서졌고, 잠비아에서는 그동안 오토바이가 받은 충격이 커서였는지 시동이 걸리지 않아 애를 먹다가 후배 황의선 군이 한국에서 보내준 부품을 받아 어렵게 수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결국 2008년 세밑을 하루 앞두고 희망봉에 도착함으로써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격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리고 두 번씩이나 대륙을 횡단하고 종단한 경험에서 나온 여유로운 마음으로 2009년 7월 1일 시작해 근 14개월에 걸친 아메리카 대륙 여행을 마침으로써 나의 길고 긴 여행, 5개 대륙의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을 끝내게 되었다.
2011.7
새로운 길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