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짓다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도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전쟁으로 수많은 피난민의 긴 행렬 속에 내가 있었습니다. 고단하고 힘든 그때의 어린 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소도 뜯기고 꼴도 베고 그렇게 보내다 아버지께서 장리쌀을 얻어 몇 달 늦게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시오리 산길을 걸어 다니며 찔레순도 꺾어 먹고, 먹을수록 배고픈 진달래꽃도 따 먹곤 했지요.
읍내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공부가 재미없어 헌책방이나 만화방에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결석도 많이 하고, 지금 뒤돌아보면 방황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간신히 학교 뒷문으로 나왔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앞에 엎드려 일이나 하는, 부모님 눈에 불이나 때는 못난 놈으로 살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어림해 봅니다. 어디 취직도 못 하고 이곳저곳 노가다 판에 돌아다니다 군대에 갔습니다. 전방 철책선 안 지피(GP)에서 근무하다 월남전에 지원 참전했습니다.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귀국해 부모님 도와 농사를 지었지요.
담배 농사는 어렸을 때부터 했습니다. 담배를 딸 때도 건조실에 매달 때도 불을 땔 때도 땀과 담뱃진이 범벅이 되기도 했지요. 비육우도 몇 마리 길러 보고, 이런저런 돈이 되지 않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아버지는 “애야 여시골 논다랑이 묵히지 마라” 간곡한 말씀 있었는데 쌀농사는 물론 보리, 밀, 콩 등의 농사를 작파한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1990년도부터 포도 농사를 했습니다. 시설하우스 2,000평에 포도를 심어 먹고살 만했는데, 루사 태풍 때 포도밭이 통째로 쓸려나갈 때는 참으로 막막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농사는 어느 것 하나 수지맞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꾸불꾸불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험한 산길, 들길, 오솔길, 강을 지나며 만났던 고마운 사람들, 밉거나 곱거나 버팀목이 되고 위안을 준 ‘시’라는 동무가 있어 따뜻하고 좋은 나날입니다. 남은 삶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여름
박운식